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사이언스 에세이] 실험실서 만나는 '국산품'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사이언스 에세이] 실험실서 만나는 '국산품'

입력
2010.11.14 11:54
0 0

큰 마음을 먹고 명품의 반열에 올라있는 주방 도구들을 샀다. 밖에서 일하느라 바쁘다고 집에서 먹는 건 대충 먹어 와서 몰랐는데 요리를 하는 그릇이 다 똑같은 게 아니란다. 어떤 재질로 어떻게 만들었느냐에 따라 음식 맛이 다르다고 한다. 가마솥에다 지은 밥이 맛있듯이 음식에서 내는 열을 외부에 빼앗기지 않고 다시 냄비 안에 가둬두는 무거운 냄비에 끓인 찌개 맛이 대충 모든 용도에 다 쓰는 보통 냄비에서 끓인 찌개보다 훨씬 맛이 좋다는 것이다. 과연, 가격만큼이나 무거운 새 냄비에다 지은 밥의 맛은 일품이었다. 역시 도구가 결과를 결정 짓는다.

물리, 화학, 공학의 집합체인 생물학 실험실은 부엌과 비슷하다. 조그만 소품부터 엄청나게 거대한 장비까지 정말 재미난 물건들이 많이 있다. 이들의 대부분은 수입품이다. 과학자들이 실험 결과에 목을 매는 만큼 좋은 기계를 선호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단 우리나라에서는 만들지 않기 때문이다. 한 번 쓰고 버리는 실험용까지 죄다 수입품이니 이를 대체할 우리 제품들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바야흐로 생물공학(BT)의 시대라고 하고, 정부와 기업은 대학 실험실에서도 돈 되는 일을 해야 한다고 외쳐댄다. BT 선진국들을 보면 틀린 말은 아니니 무조건 반대할 생각은 없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자. 지금 당장 돈을 벌 수 있는 곳은 가까이에 따로 있지 않을까? 과학적 발견을 기반으로 하는 고기술의 BT 산업은 막대한 투자가 필요하고 무엇보다 기초과학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성공할 수 있다. 그 성공도 물론 보장된 것은 아니고 투자한 100개 프로젝트 중 한 가지만 성공해도 돈벼락을 맞는 게 BT 산업의 특징이라고 한다. 그에 비해 실험실 물품 산업은 시장도 넓고 손 좋고 기술 좋기로 유명한 우리 중소기업들이 충분히 세계적 경쟁력을 가질 만한 분야가 아닐까.

사실, 선진국들 경우 분자생물학이 발전하면서 실험에 필요한 기구들을 만드는 중소기업들이 더 번창하였다. 나는 이것도 다 과학적 기반이 튼튼한 증거이고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매일 쓰는 스위스의 한 원심분리기 회사는 공원이 500명 이하인 작은 중소기업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 회사에서 제작한 원심분리기는 세계 모든 실험실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참고로, 스위스는 국민 한 사람 당 BT로 벌여 들이는 돈이 세계 1위인 나라이다.

90년대 초반, 종로 세운상가에서 아크릴판과 백금선을 사다가 전기 영동기기를 직접 만들어 썼던 기억이 난다. 모르는 것은 전파상 아저씨에게 물어가며 제작했었다. 솜씨가 어찌나 좋았던지 나중에 유학가서 만난 연구소의 전문가 못지 않았었다. 이제 생각의 전환을 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술잔을 피라미드로 쌓아놓고 맨위의 잔 위에 술을 부으면 맨 아래 잔까지 흘러 넘치는 게 자연의 이치일진대, 생물공학의 발전에 따라 기반산업들이 함께 발전해서 세계의 실험실을 주름잡을 수는 없을까? 대한민국은 본래 기술자의 나라가 아닌가.

고용정책을 좀 유연하게 바꿔 대학과 연구소가 연구자들의 작업을 맞춤형으로 도울 수 있는 기술자들을 고용하도록 하고, 실험실 연관 산업을 지원하여 중소기업이 자라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 머지않아 대한민국에서 명품 실험기구 회사들이 탄생할 것 같은데 말이다. 과학자들은, 앞장 서서 우리 물건을 쓸 준비가 다 되어있다.

이현숙 서울대학교 생명과학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