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 7월 독일군의 레닌그라드 침공을 앞두고 비밀리에 진행됐던 소련의 대규모 문화재 보호작전은 요즘도 입에 오르내린다.
레닌그라드 중심부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소장돼있던 200만점에 달하는 그리스, 로마, 르네상스 시대의 걸작품들은 이곳에서 2,500㎞ 떨어진 한 시골마을로 옮겨져 3년이 넘는 독일군의 공세에도 무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900일이 넘는 레닌그라드 봉쇄 기간 동안 독일군의 포화를 피한 것은 에르미타주 박물관의 문화재만이 아니었다.
레닌그라드의 종자연구소에 보관돼 있던 38만점의 농작물 씨앗과 뿌리, 열매도 연구원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보존됐다. 연구소에 남겨진 종자 덕분에 소련의 과학자들은 전후 1,000여 가지가 넘는 신품종 농작물을 개발할 수 있었고 이는 소련의 식량문제 해결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 품종들에는 모두 종자연구소의 창립자이자 이 종자의 절반 이상을 채집한 과학자 니콜라이 바빌로프(1887~1943)의 이름을 따 '바빌로프'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레바논 출신의 식물학자이자 환경운동가인 게리 폴 나브한(58)은 2009년작 에서 1916년부터 1933년까지 세계 각지에서 다양한 종자를 채집하고 연구했던 바빌로프의 일생을 추적한다. 저자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처럼 바빌로프 역시 씨앗의 힘을 믿었다"는 말로 그의 일생을 요약한다.
바빌로프는 17년간 중앙아시아 파미르 고원부터 북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 브라질의 아마존 우림까지 5개 대륙을 넘나들었다. 그의 작업은 종자 수집에 국한되지 않았다. 현지 농민들로부터 전통 농법을 전수받는 일도 중시했다. 직접 현지어를 배운 바빌로프는 15개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교통도 치안도 여의치 않아 주로 노새를 끌고 다녔고 첩자로 오인받아 체포되기도 했으며 말라리아에 걸려 사경을 헤매기도 하는 등 바빌로프의 여정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오늘날 과학자들은 '농생물 자원의 다양성 확보'가 의미하는 생태적ㆍ환경적 가치를 당연하게 받아들이지만 바빌로프는 그 신념 때문에 목숨까지 잃었다. 바빌로프가 다양한 종자를 수집하고 연구한 이유는 반복되는 기근으로부터 러시아의 농민들을 구제하려는 것이었지만, 이는 단작(單作)과 대농장 중심의 스탈린식 집단농장 프로그램에 부응하지 않았다. 1932~33년 대기근이 발생하자 스탈린은 농정 실패의 책임을 전가할 희생양으로 바빌로프를 지목했고 농민들을 굶주림으로부터 해방시키겠다는 신념에 평생을 바쳤던 바빌로프는 아이러니하게도 소련의 정치범 감옥에서 만성 영양실조 후유증으로 생을 마쳤다.
이 책은 단순히 바빌로프의 일생을 되돌아보고 그의 업적을 추앙하는 평전이 아니다. 저자인 나브한은 2000년대초부터 아프가니스탄, 이탈리아, 이집트, 에티오피아, 레바논, 미국 등 바빌로프의 원정길을 다시 밟았다. 바빌로프가 "풍부하고 비옥한 토양 덕택에 농작물이 눈에 띄게 다양하다"고 기록했던 이탈리아의 포강 유역은 대규모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관개농법이 도입된 후 황폐화되고 있었으며, 탐스러움과 독특한 맛으로 바빌로프가 "사과의 기원지"로 불렀던 카자흐스탄의 사과농장들은 택지와 고속도로, 쇼핑센터에 밀려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있었다.
하지만 바빌로프의 꿈이 실현되고 있는 곳도 있었다. 만성적 기근 위험에 처해있던 에티오피아는 1980년대부터 곡물의 혼합재배, 재래종작물 보존 등의 농업정책을 시행함으로써 안정적으로 식량을 확보하고 있었다.
지구 온난화, 신종 병충해, 지하수 고갈 등 현대농업의 위기를 해결하는 수단으로 '종자 다양성의 확보'는 긴요하다. 그러나 저자는 그것만으로 기아 문제의 궁극적인 해결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기아로 고통받는 사람만큼 많은 사람이 비만으로 고생하고 있는 현실은, 식량자원에 대한 평등한 접근의 필요성을 보여준다고 그는 말한다. 어떤 방식으로 식량을 생산하고 먹을지 시민들이 결정할 수 있는 민주적 체제의 필요성도 역설한다. 다양성을 압살하는 전체주의 정치체제 하에서 목숨을 잃었던 바빌로프의 교훈을 돌아보라는 것이다.
이왕구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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