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서울 도심의 남대문로로 옮기기 전까지, 한국일보는 동십자각을 경계로 경복궁과 마주 보는 종로구 중학동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때 다른 지역에서는 할 수 없는 그곳만의 경험이 있었는데 그것은 매주 수요일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리는 위안부 문제 해결 촉구 시위를 보는 것이었다. 그 시위가 시작한 지 벌써 18년이 넘었고, 시위를 이끄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는 발족 20년을 맞았다. 이들이 제기한 문제가 결국 인권과 평화라는,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가치라는 점에서 보면 20주년을 계기로 정대협 활동을 되돌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윤미향(46) 정대협 상임대표는 "5, 6년쯤 지나면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될 줄 알았는데 어느덧 이렇게 시간이 흘렀다"는 말로 20주년의 소감을 대신했다. 하느라고 했지만, 일본 정부가 위안부 할머니들의 요구를 끝내 수용하지 않은데 대한 회한이 그만큼 깊은 것이다.
정대협은 1990년 11월 16일 한국여성단체연합 등 37개 단체가 모여 발족했다. 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기생관광 문제를 논의하는 심포지엄에서 윤정옥 이화여대 명예교수가 위안부 실태를 공개한 것을 계기로 문제가 공론화했고 90년 5월 노태우 대통령의 방일에 맞춰 일본에 위안부 진상 규명과 자료 공개를 요구하라는 성명서를 내는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출범했다.
_윤정옥 교수가 위안부 문제를 연구하고 실태 조사를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윤 교수가 지금 85세입니다. 그는 태평양전쟁 당시 위안부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학교를 자퇴하고 도망을 갔다가 전쟁이 끝난 뒤 돌아왔습니다. 일본이 패망한 뒤 징병 등으로 끌려간 남자들은 돌아왔는데 여자들은 오지 못했다는 말을 듣고 또래의 여성으로서 큰 책임감을 느꼈답니다. 그 뒤 개인적으로 위안부 실태를 조사했던 것이지요."
_위안부 할머니들은 어떻게 지냅니까.
"91년 등록을 시작한 뒤 확인된 '위안부'(정대협은 위안부 앞 뒤에 작은 따옴표를 사용한다. 실제 위안부가 아니라 위안부로 불려졌던 사람이라는 뜻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다)가 234명인데 그 가운데 82명만 살아있습니다. 생존자들도 고령에 병까지 있어서 어려움이 큽니다. 병원, 요양원 등에 주로 기거하고 홀로 집에 계시는 분도 있습니다. 다행히 사회적 명예를 회복하고 정부로부터 생활비도 지원받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피켓시위를 할 때 얼굴을 가렸던 할머니들이 차차 밝게 웃고 학생들에게 공부 열심히 하라고 당부하며 자신의 주장을 당당하게 밝히는 등 삶에서 자신감을 찾았습니다."
_할머니들이나 정대협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와 법적 배상입니다. 일본 정부는 93년 위안부와 관련해 '강제성이 일부 있었다…민간업자가 했을지라도 군의 개입 하에 이뤄졌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국가의 책임을 분명하게 인정하지 않은 모호한 표현이지요. 일본 정부는 국내외적으로 압박을 받자 민간모금을 통해 할머니들에게 위로금을 주겠다고 했는데 이 역시 본질을 호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놓고 법적 책임을 다했다고 선전하고 있습니다."
_그렇다면 정대협 활동은 실패한 것입니까.
"아뇨. 우리의 활동을 통해 위안부 문제의 실상이 국제적으로 알려진 만큼 일본 정부의 태도와 상관없이 이미 이긴 싸움이라고 생각합니다."
_정대협은 어떤 활동을 했습니까.
"수요시위를 먼저 떠올리겠지만 그것 말고도 많은 일을 했습니다. 아시아 각국의 연대 체계를 마련했고 일본 정부에 진상공개와 사과 및 배상을 권고하는 특별보고서가 유엔에서 채택되도록 했습니다. 국제노동기구(ILO) 전문가위원회가 ILO 협약 위반을 근거로 일본에 배상을 요구하는 보고서를 내도록 하기도 했고요. 2000년에는 한국 일본 필리핀 여성들이 '일본군성노예전범 여성국제법정'을 도쿄에서 열어 히로히토 일본 국왕 등에게 유죄를 선고했습니다. 그 뒤에는 미국, 유럽연합(EU), 네덜란드, 캐나다 의회 등에서 일본 정부의 사과 등을 요구하는 결의가 채택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일본 정부는 전혀 변하지 않았습니다. 일본 우익의 반발도 거세고요. 그들은 우리가 일본에서 집회라도 열면 확성기를 통해 "위안부는 매춘부다" "돈 벌기 위해 자원했다"고 떠들면서 방해합니다. 고통을 안고 있는 할머니들에게 어떻게 매춘부 소리를 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_하지만 일본에서도 도움을 주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까.
"그럼요.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시민단체가 일본 전역에 있습니다. 우리와 집회도 함께 열고 일본의 참의원, 중의원 등을 만날 수 있게 주선도 해줍니다."
_한국 정부는 어떻습니까.
"할머니들이 정부의 무책임한 외교로 행복추구권이 침해 당했다며 2006년 헌법소원 심판을 청구한 적이 있습니다. 오죽하면 그랬겠습니까. 정부는 국익, 경제적 실익, 미래지향적 관계 등을 언급하며 소극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국제여론을 잘 활용하면 일본 정부를 압박할 수 있었을 텐데요. 그래서 할머니들은 정부에 실망하고 있습니다."
_정대협이 추진하는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건립은 어떻게 돼갑니까.
"비극의 반복을 막기 위해 교육의 장으로서 박물관을 짓기로 했습니다. 서울시가 그 뜻에 공감해 서대문독립공원에 자리를 내주었는데 독립운동단체들이 반대하고 있습니다. 독립공원에 위안부 피해자가 올 수 없다는 것이 이유입니다. 박물관 건립에 써달라며 돈을 내고 지난해 3월 8일 착공식 때에도 참석한 일본 여성들에게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착공식은 했지만 아직 땅을 파지 못했습니다."
_최근에는 시민들의 관심도 좀 식은 것 같은데요.
"좀 식상하게 보는 사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뒤늦게 위안부 문제를 알고 힘을 보태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_관심이 식은 분들에게 한 말씀 하신다면.
"91년 처음으로 자신이 위안부였다고 공개한 김학순 할머니는 위안부라는 사실 때문에 평생 혼자 지냈다고 말했습니다. 김학순 할머니 대신 제 할머니가 끌려갔다면 저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겁니다. 길원옥 할머니는 얼마 전 캐나다에서 증언하면서 "여러분의 할머니, 어머니, 딸이 나와 같은 일을 당했다면 잊을 수 있겠는가"라고 되물었습니다. 위안부 문제를 남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 우리의 일로 여겼으면 합니다."
_개인적으로 어떻게 해서 정대협에 합류했습니까.
"대학 졸업 후 교회의 여성운동을 하던 도중 기생관광 심포지엄에 참가했다가 위안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 역시 어렸을 때 고향(경남 남해군)에서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정대협에는 92년에 간사로 들어갔는데 처음에는 할머니들이 폐쇄적이어서 당황했습니다. 상처가 깊어서인지 저희를 믿지 못했으며 심지어 돈을 벌기 위해 자신들을 이용한다는 분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 기억들 모두 지웠습니다. 고교 2년생인 딸이 학교 선생님과 친구들로부터 위안부 문제 해결 촉구 서명을 받아오는 등 적극적으로 도와주어 힘이 됩니다."
■ 수요시위 어느덧 944회… 내년 1000회땐 평화기념비 건립 추진
정대협 활동 가운데 가장 상징적인 것이 수요시위다. 미야자와 기이치 일본 총리의 방한에 맞춰 1992년 1월 8일 처음 시위를 시작해 2010년 11월 10일 현재 944회에 이른다. 시위는 낮 12시에 열리는데 이는 점심시간을 이용해 많은 시민이 동참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시위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번도 중단된 적이 없지만, 일본 고베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는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 집결하고도 집회는 하지 않았다.
10일 시위에는 할머니 일곱 분과 국민대 순천향대 등 대학생, 일본에서 온 재일동포 할머니 및 평화운동가 등 50여명이 참가했다. 윤미향 대표는 "외국에서 출판된 여행 책 가운데 한국에 가면 수요시위를 반드시 보라는 것이 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수요시위는 내년 12월 14일 1,000회가 된다. 이에 맞춰 시위가 열리는 일본대사관 앞 이면도로에 평화기념비를 세우자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수요시위 참가자들은 한달 전 모금 운동을 시작했다. 기념비 설치가 어려우면 보도블록에 할머니들의 손도장을 찍거나 도로 가로등을 기념비처럼 만들어 서울시에 기부채납하자는 아이디어도 나오고 있다. 일부에서는 수요시위가 열리는 이면도로를 평화로로 부르자고 주장하고 있다.
박광희 편집위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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