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겨울 왜(倭)의 고베(神戶)로 기억한다. 임진왜란 400주년을 앞두고 조선 도공의 후예를 찾아다니다 오사카 영사관의 소개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컬렉션을 볼 기회가 있었다. 도쿠가와의 후손에 의해 보관돼온 컬렉션 중에서 '이도(井戶)다완'을 취재하기 위해 들어가 본 보물창고에는 아시아 각국의 보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내 기억에 뚜렷하게 남아있는 것 중에는 금으로 제작된, 제작연대를 알 수 없는 국새와 얇은 금판에 아주 섬세하게 새긴 불경이었다. 거만한 후손은 신라시대 밀교에 관한 불경이라고 자랑했다. 사진은 절대 찍을 수 없다고 했다. 문화재에 일천한 내 눈으로 봐도 한국에 있다면 단연 최상의 국보급이었다.
어떻게 해서 한 국가가 가지고 있는 국보보다 더 많은 보물들이 한 무사 집안의 수장고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는지에 대한 분노로, 젊은 기자였던 나는 치가 떨렸다. 도둑질이 들키면 돌려주는 것이 도둑의 정석이다. 내가 근무하는 대학 박물관에는 '데라우치 문고'가 있다.
조선통감을 지낸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수집한 고문헌 1만8,000여 점 중에서 130여권의 책 등을 기증받아 보관, 전시하고 있다. G20 정상회의로 왜가 강탈해간 조선왕실의궤 등 우리 문화재 1,205점을 반환한다고 한다. 그 문화재 중에서 큰 도둑 도쿠가와 집안 것도 있는지 궁금하다.
정일근 시인·경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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