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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소프트시티를 가다] <23> 드라흐텐-교통신호등이 사라진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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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소프트시티를 가다] <23> 드라흐텐-교통신호등이 사라진 거리

입력
2010.11.10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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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호등·차선 없으면 위험?… 당신의 상식이 틀렸다

도로는 위험하다. 씽씽 달리는 자동차는 언제든 살인 무기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안전을 위해 도로에 많은 것을 설치한다. 교통신호등, 속도 제한과 방향 표시, 차선, 건널목, 인도와 차도를 구분하는 턱과 가드레일…. 이 장치들을 없애버리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대혼란? 위험? 말도 안 된다? 터무니없는 발상이 아니다. 네덜란드 북부에 있는 인구 6만의 소도시 드라흐텐에는 교통신호등이 없다. 기존 교통신호들을 죄다 없앴지만, 아무 탈도 없다. 오히려 좋아졌다.

드라흐텐 도심의 라바이플라인 교차로. 버스를 포함해 하루 2만2,000대의 차량과 수천 대의 자전거, 수천 명의 보행자가 다니는 이 길엔 신호등도 표지판도 없다. 차도와 인도를 구분하는 턱도 없다. 건널목은 있지만, 다른 데서 건너도 위험은 없다. 차들이 알아서 서행하기 때문이다. 자전거 이용자들은 방향을 바꿀 때 손으로 신호를 보낸다.

신호등이 사라지자 사람들끼리 눈짓과 손짓으로 하는 상호작용이 늘었다. 자전거를 타고 교차로를 건너던 한 부인은 “더 안전해졌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서로 더 조심하고 배려하게 된 건 틀림없다”고 말했다. 보행자와 자전거가 공유하는 교차로 주변은 광장 느낌이다. 바닥에는 분수가 있어 차가 많이 다닐 때는 물줄기가 높이 솟는다. 차량이 적을 때는 아이들이 여기서 논다.

라바이플라인 사거리는 원래 네모꼴 교차로였다. 2003년 원형 로터리로 바꾸면서 언제 지나가야 할지 알려주는 신호체계를 모두 없앴다. 결과는 놀랍다. 2007년 나온 평가보고서에 따르면 변경 전 9년(1994~2002년)과 변경 후 2년(2004~2005년)을 비교한 결과 교통사고는 총 75건에서 2건으로, 그 중 사람이 다친 일은 총 17건에서 1건으로 줄었다. 교통 흐름은 신호 대기 시간이 사라짐에 따라 버스의 교차로 통과 시간이 종전의 절반으로 짧아지는 등 오히려 좋아졌다.

신호등 없는 거리는 도로를 운전자, 보행자, 자전거가 동등하게 이용하는 광장처럼 만들어 공공성을 높이는 ‘공유공간(Shared Space)’ 철학에서 나왔다. 공유공간은 네덜란드의 교통공학자 한스 몬더만(1945~2008)이 창안한, 도시 디자인과 교통 설계의 신 개념이다. 1978~2002년 네덜란드 북부 3개 주의 교통안전 책임자였던 그는 교통신호와 표시들이 오히려 안전을 위협한다고 보고 없애기 시작했다. 첫 실험은 1978년 프리슬란트 주의 작은 마을 우데하스케에서 이뤄졌다. 다들 “미쳤다”고 했지만, 도로와 마을 전체가 안전해졌다. 이후 그는 네덜란드 전역에서 100군데 이상 공유공간을 설계했다. 라바이플라인은 이 개념을 작은 마을이 아닌 도심에 적용, 그에게 전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줬다.

공유공간 개념의 핵심은 분리 대신 통합, 규제 대신 자율이다. 몬더만은 사람과 차를 섞고 도로와 주변 환경을 연결해 서로 소통하는 좀 더 인간적인 공간, 신호만 믿고 방심할 게 아니라 주위를 살펴 책임있게 행동하는 새로운 윤리를 원했다. 그건 공간의 성격, 사람들의 행동방식을 바꿔 삶의 질을 높이는 일이기도 했다.

드라흐텐의 데카덴 교차로는 2001년 공유공간으로 개조됐다. 이 구역에 들어서면 차선이 모두 사라진다. 아스팔트 대신 벽돌로 덮인, 아무런 신호도 구분도 없이 탁 트인 광장이다. 차와 사람, 자전거가 뒤섞인 채 방향도 제각각으로 움직인다. 한국의 도로와는 전혀 다른 낯선 풍경에 어리둥절했다. 규제가 모두 사라진 거리에서 혼란도 위험도 느껴지지 않는 게 신기하다. 규칙은 단 하나, 우측 통행 우선이다. 개조 후 이곳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만남의 장소가 됐다. 도로 양쪽 식당과 상점들은 손님이 더 늘어났다.

네덜란드의 또다른 도시 하렌의 도심을 관통하는 라이크스 대로 중 800m는 공유공간이다. 이곳 역시 광장처럼 보인다. 주변에는 카페와 상점들이 늘어서 사람들로 붐빈다. 2001년까지는 도로가 좌우 공간을 분리시켰지만, 지금은 하나로 연결됐다.

이 거리의 카페 밖 테이블에 앉아 햇볕을 즐기던 주민 레온 발렌틴(66)씨는 공유공간이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차들이 속도를 줄여서 훨씬 더 안전해졌죠. 바로 앞에 차가 다니는 이런 데서도 아무 걱정없이 느긋하게 즐길 수 있으니까요. 분위기도 더 활기차고 아늑해졌고요.” 옆에 앉은 친구 루이 코페루스(68)씨가 맞장구를 쳤다. “예전보다 확실히 사람들이 많아졌어요. 이 카페 맞은편은 공터였는데, 도로가 공유공간으로 바뀐 뒤 왕래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레스토랑이 생겼죠.”

공유공간이 삶의 질을 어떻게 바꾸는지 보여주는 좀더 혁신적인 사례는 하렌의 작은 마을 노르드라렌에서 볼 수 있다. 이곳의 리쇼크초등학교 앞 도로는 아이들의 놀이터다. 공유공간으로 개조하기 전엔 건널목과 신호등, 학교와 도로를 분리하는 1.5m 높이의 담장이 있었다. 지금은 다 없다. 학교 운동장이 도로까지 연장된 것이다.

공유공간으로 바꾼 도로가 더 안전하다는 것은 여러 지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사실이다. 도로 한복판에 의자를 놓고 앉아 있거나, 눈을 감고 뒤로 걷거나, 아이들이 뛰놀아도 걱정할 게 없는 곳, 그게 공유공간이다. 차량 운전자가 이들에게 화를 내거나 경적을 울리지도 않는다.

네덜란드 북부에서 30여년 전 시작된 공유공간은 이제 전 세계로 퍼지고 있다. 유럽이 가장 앞서 있고, 미국과 캐나다, 남미, 호주, 뉴질랜드, 일본도 도입하기 시작했다. 유럽 5개국은 2004~2008년 공유공간 공동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네덜란드, 독일, 덴마크, 벨기에, 영국의 7개 지자체가 참여한 이 사업의 결과, 안전과 교통 흐름이 모두 좋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 별도로 영국은 대도시인 런던 도심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공유공간을 만들고 있다. 지역에 따라 부분적으로 또는 전면적으로 추진한다. 런던은 일단 교통신호등의 20%를 없앨 계획이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 '무신호' 한국서도 가능할까

교통 신호등을 없애는 것이 한국에서도 가능할까? 내년에 그런 곳이 등장할 가능성이 있다.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와 경찰청은 원주, 군산, 창원에서 추진 중인 ‘교통 운영체계 선진화 모델 도시 사업’의 하나로 ‘무신호 구역’ 설치를 검토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신호등을 없애는 것일 뿐 도로를 보행자, 운전자, 자전거족이 동등하게 공유하는 단계까지 염두에 둔 건 아니다. 그런 공유공간이 한국에 도입되려면 좀더 시간이 걸릴 듯하다.

이 프로젝트는 도로교통공단, 서울시정개발연구원, 대한교통학회가 공동 연구 중이다. 김동호 도로교통공단 연구원은 “무신호 구역은 미국과 유럽의 도시 외곽이나 주택가 이면도로에는 이미 많지만, 한국에서는 신호가 있어도 안 지키는 사람이 많은 교통문화 등으로 볼 때 성급히 시행했다간 엄청난 혼란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조심스레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무신호 구역이나 공유공간만큼 혁신적인 것은 아니지만, 신호 체계를 바꿔 교통 안전을 높이는 실험은 시작됐다. 경찰청은 지난해 7월 교통량이 비교적 적은 전국 도로 8,004곳에서 신호등을 심야에는 빨강 노랑 파랑의 정주기 신호가 아닌 점멸 신호로 바꿨다. 효과가 좋아서 지금은 1만9,400여 곳(지난 8월 현재)에서 확대 운영 중이다. 시행 후 지난해 7월부터 올해 6월까지 첫 1년 동안 교통사고는 전년 동기 5,100건에서 4,200건으로 17.6% 줄었고, 사망자는 54명에서 37명으로 31.5% 감소했다. 깜빡이는 노란 신호등이 운전자들로 하여금 더욱 조심하게 만든 덕분이다.

충북 보은군은 지난 7월 모든 교통 신호등을 24시간 점멸 신호로 바꿨다. 그 중 교량 공사 중인 교차로 한 곳은 변경 후 사고가 잦아 최근 정주기 신호로 되돌렸다. 사고는 군 전역이 점멸 신호로 운영되는 줄 모르는 외지인이 주로 냈다. 교통 신호체계 개선에는 홍보와 인식 전환이 따라야 함을 알 수 있다. 무신호 구역이나 공유공간 도입에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오미환기자

■ 인터뷰/ 자비네 루츠 공유공간연구소 연구원

드라흐텐에는 공유공간연구소(Shared Space Institute)가 있다. 지난해 9월 설립된 이 연구소는 공유공간의 이론과 실제를 현장 프로젝트와 연결해 연구하고 보급한다.

연구원 자비네 루츠(53ㆍ사진)씨는 공유공간 개념의 창시자인 한스 몬더만을 1999년 만나 연구소 동료 빌렘 푸르트휘스와 함께 이 개념의 원칙들을 개발해온 주역이다. 그는 “공유공간의 핵심은 교통신호등과 표지판을 없애는 게 아니라 거리를 공공영역의 일부로 통합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도로는 차량 통행 전용이 아니라 운전자, 보행자, 자전거가 공유하며 소통하고 배려하는 공간이어야 합니다.”

공유공간은 기존 도로보다 안전하다는 게 입증됐다. “신호등과 차선이 없는 거리가 처음엔 불안할 수 있죠. 하지만 위험하다고 느끼면 조심하게 됩니다. 그게 공유공간이 가능할 수 있게 하는 주요 원칙 중 하나이기도 하고요. 공유공간은 우리의 인식과 행동에 변화를 요구합니다. 시간이 걸리는 일이지요.”

공유공간의 설계와 운영은 여러 분야가 협력해야 하는 통합적 작업이다. “교통공학뿐아니라 도시 디자인, 건축, 행동심리학, 교통계획, 교육, 지역 재생 등을 두루 고려해야 합니다. 행정 당국의 여러 관련부서 간 협력, 지역 주민들의 이해, 지역 특성과 교통 환경에 대한 면밀한 검토도 필수적이죠.”

공유공간은 작은 마을뿐 아니라 대도시 도심에도 적용되는 개념이다. “공유공간은 공공장소를 사회의 중심으로 봅니다. 산보, 쇼핑, 만남 등 다양한 활동이 거기서 일어나죠. 공유공간은 획일적으로 적용될 수 없습니다. 지역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띨 수 있죠. 어느 경우든 중심은 교통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결국 공유공간의 목표는 공공장소의 공공성을 높여 삶의 질을 끌어올리는 데 있습니다.”

공유공간연구소가 참여한 최근 프로젝트 지역으로 그는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 글라인슈테덴을 소개했다. 높은 담장으로 가려졌던 학교 운동장이 도로의 일부가 된 곳이다. 대규모 병원 복합지구를 공유공간으로 재설계하는 프로젝트도 오스트리아 그라츠에서 곧 시작된다. 전 세계로 확산 중인 공유공간의 성공적인 사례로 그는 영국 런던과 애쉬포드, 독일 봄테를 꼽았다.

오미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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