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한 조명이 꺼지면서 웅성거리던 객석이 일순 조용해졌다. 이어 각국에서 한국을 찾은 유학생들이 만든 홍보영상이 대형 스크린에 뜨자 곳곳에서 웃음보가 터졌다. 캠퍼스에서 얼굴 맞대며 지낸 친구들의 모습을 스크린으로 보는 게 어색하면서도 신기한 모양이다. ‘생각을 전하고 싶다’ ‘마음을 나누고 싶다’는 자막과 함께 본격적인 무대 공연이 시작됐다.
10일 오후 고려대 인촌기념관 대강당. 제9회 전국 외국인 한국어 연극 한마당이 펼쳐졌다. 한국의 전래동화를 연극으로 꾸며 그간 갈고 닦은 한국어 실력을 뽐내는 무대다. 1,000여 석이 넘는 대강당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고려대 우송대 부산 외국어대 경희대 가톨릭대 등 5개 대학에서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배우고 있는 외국인유학생 50여 명이 이번 행사에 참가했다.
9명으로 꾸려진 가톨릭대 팀이 ‘콩쥐팥쥐’로 첫 무대를 꾸몄다. 누런 저고리에 앞치마 차림의 콩쥐와 화려한 색동 저고리를 입은 팥쥐는 영락없는 전래동화의 한 장면. 뻔한 스토리에 지루해질 수 있었지만 톡톡 튀는 재치 있는 아이디어로 관객을 사로잡았다. 사또가 등장할 때 흘러나온 드라마 ‘꽃보다 남자’의 삽입곡이나 사또와 콩쥐가 재현한 영화 ‘타이타닉’의 한 장면은 신선한 웃음을 선사했다. ‘사돈님’(사또님) 같은 발음은 애교가 넘쳤다. 이들은 ‘전래동화와 같은 해피엔딩으로 끝나겠지’라는 생각을 보기 좋게 뒤집었다. 사또와 결혼을 하고서도 ‘식모’신세를 면하지 못한 콩쥐의 마지막 대사. “과연 내 운명을 바꿀 수 있을까”. 관객들은 배꼽을 잡으며 뒤집어졌다.
가톨릭대에 이어 무대에 오른 고려대 팀. 심 봉사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한 공양미는 ‘고향미’가 됐지만 우정의 무대를 패러디 한 상봉 장면, 노트북으로 심 봉사를 검색하는 장면 등 기발한 착상은 관객들의 박수 갈채를 받았다. 왕비가 된 심청과 임금의 키스 장면에서 관객들의 환호는 절정에 이르렀다.
앙칼진 콩쥐 계모 역할로 여자 인기상을 차지한 가톨릭대 마츠다 아카네(20)씨는 “한국에 오기 전 일본에서 5년 정도 한국어 공부를 했는데 겨울연가에 나온 배용준이 좋아 시작했다”고 말했다. 병풍 등 무대 장치를 직접 만들며 공연을 준비한 같은 대학 왕이페이(21ㆍ여)씨는 “연극을 준비하면서 발음을 지도해주신 선생님들 덕분에 많이 좋아진 것 같다”며 뿌듯해했다. 왕이페이씨는 두 달 전 한국에 온 교환학생이다.
고려대 팀의 최연장자 나카가와 다카시(33)씨. 일본에서 재활치료사로 일했다는 그는 “한국과 일본을 왔다갔다하며 일하고 싶어 7개월 전에 한국을 찾았다”며 “대사는 별로 없었지만 다른 나라 친구들과 준비하는 과정이 즐거웠다”고 말했다. 고려대 관계자는 “한국어 실력을 키우는 한편으로 국경을 초월한 화합의 의미가 있다”고 행사 취지를 설명했다.
이날 대상은 콩쥐팥쥐를 연기한 우송대 팀에게 돌아갔고 개인 연기상은 경희대 팀의 타미르씨, 고려대 팀의 진소계 씨가 각각 차지했다.
이성기기자 hangi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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