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경기가 감동을 주는 가장 큰 이유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고자 하는 도전정신 때문이 아닐까. 마지막 땀방울까지 요구하는 육체적 고통과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저앉고 싶은 심정을 억누르고 골인지점까지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서 사람들은 아낌없이 박수를 보낸다. 하지만 유일하게 달리고 싶은 욕망을 접어야 하는 종목이 있다. 경보다. 속보 레이스인 경보는 비인기 설움을 겪고 있는 육상 중에서도 대표적인 기피 종목이다. 단거리의 화려함도, 장거리의 장엄함도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걷는 것도, 뛰는 것도 아닌 보법(步法)은 곧잘 희화화되곤 한다. 그래서일까. 국가대표 선수라고 해봐야 고작 6명이다. 하지만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한국 육상이 기대하는 금메달이 바로 경보에서 나올 가능성이 크다. 김현섭(25ㆍ삼성전자)의 존재감 때문이다.
올 시즌 20km 레이스에서 김현섭의 기록(1시간19분36초)은 아시아 챔피언이자 세계랭킹 3위에 해당한다. 지난달 경남 진주에서 열린 전국체전에서 자신의 한국기록을 5초나 단축시킬 정도로 페이스가 좋다. 일본의 스즈키 유스케(22ㆍ1시간20분06초)와 후지사와 이사무(23ㆍ1시간20분12초) 그리고 중국의 왕하오(21ㆍ1시간21분13초), 왕젠(19ㆍ1시간20분42초)등이 홈 텃세를 업고 이변을 기대하지만 실력 차가 워낙 커 금메달은 떼논 당상이라는 평이다.
이중 왕하오가 2008 베이징올림픽 4위에 이어 이듬해 베를린 세계육상선수권에서 은메달(1시간19분06초)을 따내며 아시아 지존으로 떠올랐지만 올 시즌엔 김현섭보다 1분 이상 뒤처져 적수가 되지 못한다.
부산에서 전지훈련중인 김현섭은 4년전 카타르 도하 아시안게임에서 은메달에 그친 한을 이번에 반드시 풀겠다며 벼르고 있다. 김현섭을 7년째 지도하고 있는 이민호 코치는 “김현섭의 최대강점은 유연성에서 나오는 스피드와 흠 잡을 데 없는 폼”이라고 말했다. 사실 경보만큼 폼을 강조하는 경기도 없다. 폼이 제대로 잡히지 않으면 두 발이 동시에 지면에서 뜨는 파울을 저지르기 싶기 때문이다. 이 코치는 “(김)현섭이의 약점이던 막판 스퍼트도 많이 개선됐다”고 덧붙였다.
김현섭의 금메달 가도에 최대 걸림돌은 오히려 심판이라는 목소리가 높다. 한국경보 1세대이자 국제심판인 전두안 경보기술위원장은 “경보는 심판의 입김이 가장 센 종목”이라며 “파울 관리에 따라 메달색깔이 바뀔 수도 있다”고 말했다. 경보는 모두 9명의 심판이 레이스를 지켜보는데 한 선수가 파울을 세 번 받으면 실격처리 된다.
실제 지난 9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국제육상경기연맹(IAAF) 경보 챌린지 파이널 10㎞ 경기에서 김현섭은 골인지점까지 선두를 질주했으나 레이스 초반 받은 2개의 파울로 실격을 우려해 막판 스퍼트를 하지 못해 결국 6위에 그쳤다. 임상규 삼성전자 육상단 감독은 “파울 2개를 받으면 레이스가 급격히 위축된다”며 특히 “이번 아시안게임에서는 화교 심판들이 대거 참가해 이들의 보이지 않는 텃세를 이겨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중학교 2학년 시절 육상 중ㆍ장거리를 뛰다 코치의 권유로 경보에 입문했다는 김현섭은 “처음에는 뒤뚱거리는 폼때문에 창피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친구들 사이에서 축지법(縮地法)을 쓰는 도인으로 불린다”며 “경보 사상 처음으로 국제종합대회에서 금메달을 캐내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현섭의 최종 좌표는 그랜드슬램(아시안게임, 세계선수권, 올림픽)이다. 그는 내년 대구세계선수권과 2012년 런던올림픽 시상대에도 반드시 태극기를 올리겠다며 굳은 각오를 다졌다.
최형철기자 hccho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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