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번째 방> 은 김미월(33)씨가 등단 6년 만에 처음 발표한 장편소설이다. 김씨를 아는 사람들은 이 장편이 바로 "김미월다운 소설"이라고 말한다. 그리 사교적이지는 않지만 밝고 긍정적인 태도로 주변 사람들을 기분좋게 하는 작가의 성품을 빼닮은 작품이라는 의미에서다. 여덟>
25세 대학생 오영대가 우연히 30대 초반 여성 김지영의 일기를 읽는다는 두 겹의 이야기 구조로 이뤄진 <여덟 번째 방> 에서 세칭 '88만원 세대'로 묶일 만한 두 주인공의 처지는 썩 좋지 못하다. 영대는 제대하자마자 짝사랑하던 여자 선배에게 "니 인생에 좀더 진지해져 봐"라는 타박과 함께 이별 통보를 받고, 소개팅에서 만난 동갑내기 여대생에게 느닷없이 "넌 꿈이 뭐야"라는 질문을 받고 말문이 막힌다. 스스로를 한심스럽게 여긴 영대는 '진짜 삶'을 살겠다며 난생 처음 집에서 나와 살면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지만 만만찮은 세상에 곧 주눅이 든다. 여덟>
그때 영대는 자신의 지하 단칸방에서 먼저 살았던 지영이 남겨둔 짐에서 '여덟 번째 방'이라는 제목이 붙은 노트를 발견한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면서 고향을 떠난 그녀가 서울에서 아홉 번째로 얻은 방에서 자신의 20대를 회상하는 글이 적힌 이 노트는 생활고와 실연으로 점철된 그녀의 청춘기다. 그녀로 하여금 "옥탑에서 지하로, 꼭대기에서 밑바닥으로, 서울은 내게 끄트머리만을 허락하는구나"(204쪽)라는 자조 섞인 푸념을 하게 만드는 이사의 이력은 그녀의 암담한 젊은 날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내면의 상처와 절망적 현실에 고통을 받는다는 점에서 지영은 작가 김씨의 예전 소설 속 인물들을 닮았다. 하지만 다른 등장인물들과 달리, 그녀는 지나온 세월의 시련을 자기성장의 과정으로 넉넉하게 받아들이면서 작가의 문학적 궤도를 돌려놓는다.
소설 후반부에서 지영은 불현듯 그동안 거쳐온 방들을 둘러볼 마음을 먹는다. 이 인상적인 순례의 최종 지점인 여덟 번째 방의 현관문에 붙은 도어뷰 렌즈를 들여다보며 그녀는 그 안에 자신이 거쳐온 방들이 첩첩이 들어있다고 상상한다. "그 방들을 역순으로 되짚어 올라가다 보면 마침내 스무 살 시절의 나 자신과 조우할 수도 있으리라. … 그냥 말없이 먼저 안아주기부터 해야겠다. 너는 참 평범하고 보잘것없지만 세상에 오로지 하나뿐인 존재라고."(227쪽)
이 도저한 자기긍정은 그동안 김씨의 소설에서 주요 모티프로 쓰였던 방(房)의 의미 변화에서도 드러난다. 김씨의 첫 소설집 <서울 동굴 가이드> (2007)에서 방은 말 그대로의 방이거나 피씨방, 집주인 몰래 가꾸는 옥상 정원, 도심 한복판의 인공 동굴 등의 변형된 형태로 등장인물이 현실에서 도피해 자폐적 유희를 누릴 수 있는 공간 노릇을 했다. <여덟 번째 방> 에서의 방 역시 궁핍한 자들에게 겨우 허락된 최소한의 사적 공간이기는 하나, 작가 김씨는 여기에 이사라는 동적인 설정을 끌어와 삶이란 고난과 끊임없이 응전하는 가운데 풍성해지는 것임을 비유적으로 설파한다. 여덟> 서울>
평소 불경을 즐겨 읽는다는 김씨는 가장 좋아하는 구절로 '금강경'에 나오는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을 꼽았다.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꿈, 환영, 물거품, 그림자와 같다'로 해석되는 이 법구에 대해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허무주의적인 의미로 읽히기 쉽지만 저는 다르게 해석합니다.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을 때 참된 나를 볼 수 있다는 것이죠."
지금 젊은 세대가 맞닥뜨리고 있는 냉엄한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마냥 사회구조를 탓하기보다는 개개인의 자기 갱신에 눈을 돌리는 태도에서 성숙하고 균형 잡힌 김씨의 윤리의식을 엿보게 된다. 자기 연민에 붙들리지 않고 끊임없이 마음 속에 살아갈 의지를 지피는 <여덟 번째 방> 의 주인공 지영은 아마도 작가의 페르소나일 것이다. 여덟>
● 약력
▦1977년 강원 강릉 출생
▦고려대 언어학과,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2004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서울 동굴 가이드> (2007) 서울>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김주영기자 wil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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