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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무의 선비 이야기] <59> 인조반정의 명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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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무의 선비 이야기] <59> 인조반정의 명분

입력
2010.11.08 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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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반정의 명분은 광해군이 존명사대(尊名事大)를 어겼고, 폐모살제(廢母殺弟)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반정군(反正軍)이나 서인의 거사 명분일 뿐이다.

선조는 임진왜란을 당해 고립무원이었다. 난리가 나자 신료들은 다 달아나고 관군은 연전연패했다. 선조는 서울과 평양을 지킨다고 큰소리 쳐놓고 달아나 의주에서 명나라로 건너가려다 유성룡의 만류로 가지 못했다. 그런데 명나라 군대가 와서 왜군을 쫓아내고 자기의 왕 자리를 지켜 주었으니 명나라가 고마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전쟁이 끝난 뒤의 논공행상에서도 자기를 호종(扈從)한 신하들에게만 공신호를 주고 의병을 일으키거나 전공을 세운 무장들은 혹은 죽이거나 귀양 보냈다. 그들의 인기가 자기보다 높으니 마음만 잘못 먹으면 역성혁명도 가능하다고 본 모양이다.

반면에 광해군은 분조(分朝)를 이끌고 백성들을 안정시키며 군사를 모아 국권을 지키는데 효과적으로 대처했다. 선조는 왕위에 있을 명분이 없었다. 그리하여 여러 차례 선위(禪位) 소동을 벌이고, 56세의 나이에 19세 된 처녀에게 장가를 들어 적자를 얻어 광해군을 갈아치우려 했다. 그러다가 시운이 따르지 않아 죽었기 때문에 광해군이 왕이 될 수 있었다.

동인에게 밀린 서인은 이것을 정권탈환의 명분으로 삼았다. 광해군은 적자도 아니요, 장자도 아닌 약점이 있었다. 이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북인정권은 여러 가지 무리수를 두었다. 폐모살제가 그것이다. 이것을 빌미로 서인은 인조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낸 것이다.

서인 관료들은 인목대비가 광해군의 어머니이니 부모의 도리를 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서인이 적자인 영창대군을 노골적으로 옹립하려 하니 정권 보위를 위해 무리한 수를 둔 것이다. 이에 서인은 왕조례의 특수성을 무시하고, 가례에 입각한 천하동례(天下同禮)를 내세웠다. 왕조례도 사대부례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나 국왕보다 사대부가 우월하다는 논리를 주창한 것이다.

물론 군약신강(君弱臣强)의 정국에서 나올 수 있는 논리이기는 하지만 16세기 동아시아 대 변환기에 명나라만 맹종하고 신흥 청나라에게 무모하게 대들다가 정묘 ․ 병자호란을 자초한 것은 잘 한 일인가? 오히려 광해군은 이러한 난국을 헤쳐나가기 위해 이중외교를 하면서 적절히 대처했다. 어느 쪽이 현명한가?

폐모살제만 해도 그렇다. 골육상쟁(骨肉相爭)이니 잘 한 일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왕권을 보위하기 위해서 광해군만 유독 패륜을 저질렀나? 태종의 왕자의 난, 외척제거나 세조의 단종제거는 어떤가? 크게 보면 정쟁에는 늘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국가를 더 중시한다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사림의 입장에서, 서인의 입장에서 인조반정을 바라만 보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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