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晶月) 나혜석(羅蕙錫ㆍ1896-1948)은 한국 근대 최초 여성화가이자, 작가, 여성해방론자로 한국 여성사의 한 샛별이었다. 일류 화가, 작가, 사상가로 뚜렷한 자기 세계를 추구했던 여성으로, 남편이 아닌 남자와 연애를 하고, ‘이혼 고백장’과 같은 자기를 드러내는 글쓰기를 통하여 지속적으로 여성에 대한 ‘신화’를 해체하는 작업을 그치지 않았던 그미는 ‘100년을 앞서 살았던 여성’이었다.(이상경 )
나혜석은 한마디로 사건의 일생을 살았다. 군수를 지낸 관료의 딸로 수원에서 태어났고, 동경여자미술학교에 유학한 19세에 일본의 전위적 여성 문예지 (靑鞜)의 세례를 받으면서, 유학생학우회 잡지에 ‘이상적 부인’을 발표하며 스스로 여성해방론자의 길을 선택했다. ‘이상적 부인’은 넘치는 의욕에 비하면 거의 소화되지 않은 사상과 치졸하게 모방된 문체로 되어 있다.
그러나 개성, 자각, 이상적 부인 등의 열쇠 말이 두드러졌고, ‘그림자(影子)도 보이지 않는 어떤 길을 향하여 무한한 고통과 싸우며 노력코자’ 하는 의지가 뚜렷이 드러난 삶을 지향했다.
‘신여성’으로 나혜석의 자각은 그미의 ‘모(母)된 감상기’를 통해서 일차적으로 폭발하였다고 할 만하다. 1920년 4월 25세의 나이로 결혼한 나혜석은 이듬해 4월에 첫 딸을 낳고, ‘김(우영)과 나(혜석)의 기쁨’이란 뜻으로 김나열(金羅悅)이라는 이름을 지어, 딸의 출산을 자축하였다. 이 맘 때쯤 나혜석의 시 ‘인형의 가(家)’가 발표되었는데, 이야말로 그의 여성해방 사상을 잘 드러낸 작품이었다.
내가 인형을 가지고 놀 때/기뻐하듯/아버지의 딸인 인형으로/남편의 아내 인형으로/그들을 기쁘게 하는/위안물 되도다.
(후렴) 노라를 놓아라./최후로 순순하게/엄밀히 막아 논/장벽에서/견고히 닫혔던/문을 열고/노라를 놓아주게. (중략)
아아, 사랑하는 소녀들아/나를 보아/정성으로 몸을 바쳐다오./맑은 암흑 횡행(橫行)할지나/다른 날, 폭풍우 뒤에/사람은 너와 나.( 1921.4.3)
이 해(1921) 1월 25일부터 에 입센의 가 양백화(梁白華) 등의 번역으로 연재되는 마지막 회에 나혜석의 이 노래가 실렸다. ‘노라’는 여성 해방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나열을 낳아 기른 지 2년에 문제의 ‘모(母)된 감상기’를 잡지에 발표했는데, ‘조선 역사에 처음 있을’ 어머니의 고백이면서, 이 세상 모든 여성이 겪어왔을 해산의 경험과 감상을 글로 공표하는 사실 자체로서 ‘사건’이었다.
이를 비판하는 백결생(百結生)의 ‘관념의 남루(襤褸)를 벗은 비애’와 다시 나혜석의 반박으로, 여성의 허물 벗기는 한층 대담해졌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3ㆍ1운동 때에는 김마리아 등과 여성 운동을 조직한 혐의로 일본 경찰에 신문을 당하고, 이렇게 그미는 한국 근대 여성사 100년을 앞서 산 선각자였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