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 지음
창비 발행ㆍ120쪽ㆍ7,000원
정호승(60) 시인의 열 번째 시집이다. 그의 바로 전 시집 (2007)에 이은 두 글자의 간결한 제목이, 올해 환갑 나이를 맞은 그의 새로운 시적 지향을 암시한다. 수록된 시 80편 중 5편을 빼면 시 한 편의 분량이 한 쪽을 넘지 않는다. 그 중 25편은 10행 이하의 짧은 시다.
‘펄펄 끓는 물에/ 꽃이 핀다/ 오직 한 사람을 위하여/ 그 꽃을 꺾어/ 꽃다발을 만든다/ 사랑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기 위하여/ 펄펄 끓는 물에/ 꽃은 다시 깊게/ 뿌리를 내린다’(‘물의 꽃’) 정씨는 “침묵의 바닥에서 피어나는 꽃이 시가 아닌가 싶어 하고픈 말을 가능한 한 감춘다는 생각으로 시를 썼다”고 말했다.
그 스스로 “공동체에서 개인의 문제로 시적 관심사를 전환한 계기”로 꼽는 시집 (1997) 이후, 사랑은 그의 삶과 문학에 있어 가장 큰 화두다. 그의 시는 줄곧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은 왜 귀중하고도 어려운가, 우리는 과연 누군가를 온전히 사랑할 수 있는가 등을 탐문해왔다. 때로는 각박한 세태와 인간적 원한에 가로막혀 좌절하면서도 시시포스처럼 사랑을 간구해왔던 그의 문학적 도정이 이번 시집에서 압축적으로 드러나는 느낌이다.
시인은 짐짓 성숙한 척 자신을 꾸미지 않는다. 나이 들어서도 사랑 앞에서 휘청대며 고투하는 모습을 여실하게 드러낼 따름이다. 그의 시가 지닌 호소력은 이런 솔직함에서 비롯된다. 그의 말처럼 ‘침묵의 바닥에서 피어나는’ 짤막한 시들에서 여느 장광설이 무색한 절규가 들린다.
‘나의 눈물은 뜨거운 바퀴가 되어/ 차가운 겨울 거리를 굴러다닌다/ 남의 불행에서 위로를 받았던 나의 불행이/ 이제 남의 불행에서 위로가 되는 시간/ 밤늦게 시간이 가득 든 검은 가방을 들고/ 종착역에 내려도/ 아무데도 전화할 데가 없다’(‘충분한 불행’에서)
회한도 굳이 감추지 않는다. ‘어느 벽보판 앞/ 현상수배범 전단지 사진 속에/ 내 얼굴이 있었다/ … / 내가 무슨 대죄를 지어/ 나도 모르게 수배되고 있는지 몰라/ 벽보판 앞을 평생을 서성이다가/ 마침내 알았다/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죄/ 당신을 사랑하지 않고/ 늙어버린 죄’(‘어느 벽보판 앞에서’에서)
시인은 완전한 사랑이 가능한지 여전히 알 수 없다고 재차 고백한다. 하지만 그는 이 시집을 도돌이표로 끝맺지 않는다. “어쩌면 사랑을 향한 미완성의 도정 자체가 삶이 아니겠냐”고 넌지시 새로운 깨달음을 전한다.
‘내 짐 속에는 다른 사람의 짐이 절반이다/ 다른 사람의 짐을 지고 가지 않으면/ 결코 내 짐마저 지고 갈 수 없다/…/ 이슬에도 햇살의 무게가 절반 이상이다/ 이제 짐을 내려놓고 별을 바라본다/ 지금까지 버리지 않고 지고 온 짐덩이 속에/ 내 짐이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가 비틀거리며 기어이 짊어지고 온/ 다른 사람의 짐만 남아 있다’(‘짐’에서)
이번 시집엔 그의 첫 시집 에 들어있던 시 ‘눈사람’의 후속작으로 읽힐 만한 시 2편이 들어있어 흥미롭다. 예전 시에서 사람들의 외면을 받으며 햇살에 녹아내리던 눈사람은 아이들에 의해 운구되고(‘운구하다’), 눈사람의 칼을 품고 길을 떠났던 소년은 화엄사 대웅전 부처 앞에 칼을 내려놓고 ‘칼의 뿌리까지 썩을 때까지/ 썩은 칼의 뿌리에/ 흰 눈이 덮일 때까지/ 엎드려 운다’(‘폭설’에서). 칼로 상징되는 마음의 분노를 버리고자 하는 시인의 의지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김주영기자 wil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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