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행 바둑규칙에 따르면 대국 중 패싸움이 벌어졌을 때 패감을 쓰지 않고 바로 패를 되따내면 반칙이다. 그러나 반칙을 저질렀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반칙패를 당하는 건 아니다. 바둑에서는 따로 심판을 두지 않고 철저하게 당사자 해결 원칙을 택하고 있어서 한쪽에서 반칙을 저질렀다 해도 상대방이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면 없던 일이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동안 공식 대국에서 패감을 쓰지 않고 패를 되따냈다가 상대에게 지적을 받아 즉각 반칙패를 당한 적도 많지만 반대로 상대가 그냥 눈감아 줘서 무사히 넘어간 경우도 적지 않다.
지난달 24일 한국바둑리그 신안천일염 이호범과 충북&건국우유 허영호의 대국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바둑판 한 쪽에 양패가 생겼는데 허영호가 양패 중 한 곳을 따내고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이호범이 깜빡 실수로 다시 그 패를 되따냈다. 이는 명백히 반칙이다. 그러나 허영호가 화장실에 다녀 오느라 상대가 반칙을 저지른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는지 그냥 대국을 계속했는데 공교롭게도 허영호가 반집을 졌다. 현행 대국규칙에 따르면 이호범이 중간에 반칙을 했지만 허영호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승부는 그대로 허영호의 패배가 맞다.
그러나 당시 이 대국이 바둑TV를 통해 생중계되고 있었기 때문에 인터넷바둑사이트에는 즉각 바둑팬들의 질의와 항의가 쏟아졌다. 경기 중인 선수가 반칙을 했으면 응당 반칙패를 선언해야지 상대방이 모른다고 해서 그냥 넘어가면 되느냐는 의견이 많았다. 프로기사들 사이에서도 현행 대국규칙이 요즘 대국 현실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과거 골방에서 대국자 두 명만 마주 앉아 바둑 두던 시절에는 당사자 해결 원칙이 유용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처럼 모든 대국이 TV나 인터넷을 통해 실시간으로 생중계되는 시점에서는 맞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사실 이번 경우에도 당시 검토실에 있던 양팀 감독이나 선수들이 모니터를 통해 이호범이 반칙을 저지르는 걸 뻔히 보고 있었지만 ‘대국 중 벌어지는 모든 문제는 대국자끼리 해결해야지 제3자는 일체 간여할 수 없다’는 원칙에 따라 그냥 잠자코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우선 한국바둑리그와 같은 단체전의 경우만이라도 이와 비슷한 일이 벌어졌을 경우 소속팀 감독이 선수를 대신해 이의를 제기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이 많다.
박영철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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