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써서 밥벌이를 한다 하면 흔히들 TV는 거들떠도 안 보고 책만 읽는 줄 안다. 하지만 솔직히 책 안 읽은 날은 있어도 TV 안 본 날은 드물 만큼 나는 TV가 좋다. 특히 같은 드라마를 할 때는 아침부터 마음이 설렌다. 이 드라마를 하는 두어 달 동안 월, 화요일엔 본방송을 보고 토요일에 또 재방송을 챙길 만큼 이른바 '성스폐인'이 되어 살았다.
누구는 꽃미남 배우들 보는 재미가 그리 쏠쏠하냐고 비웃지만, 유혹을 당하지도 유혹을 하지도 못하는 불혹의 아줌마가 어찌 그런 이유만으로 TV 앞을 지켰겠는가? 나잇값 못한다는 흰 시선들을 불사하며 20부 전편을 본방으로 사수한 것은, 청춘이 얼마나 아름다우며 내가 청춘의 질문들로부터 얼마나 멀리 달아나 타성의 안일에 젖어 있는지 이 드라마가 깨우쳐주었기 때문이다.
청춘은 아름답다. 노화를 모르는 젊은 세포 때문이 아니라 계산을 모르는 순수와 원칙을 사랑하는 용기가 있기에 청춘은 빛이 난다. 사람은 누구나 소중한데 왜 누구는 당연한 권리를 위해 제 몸에 불을 댕겨야 하며, 왜 누구는 제 욕심을 위해 숱한 목숨을 사지로 내몰고도 무사하냐고 분노하는 뜨거움이 있기에 청춘은 아름답다.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지 않는 것은 시가 아니며,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을 분노하지 않는 것은 시가 아니며,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거짓을 풍자하며 선을 권하고 악을 징계하는 뜻이 없는 것은 시가 아니다."
드라마에서 그릇된 세상을 바로잡겠다고 나선 젊은 유생이 스승 정약용의 글을 빌려 제 뜻을 밝힐 때 나는 목이 멨다. 그것은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아들에게 쓴 편지의 한 대목. 홀로 남도 땅 끝자락에서 갇힌 몸이 되어 기약 없는 세월을 살아야 했던 마흔일곱의 아비가, 폐족(廢族)이 되어 과거도 볼 수 없는 아들에게 당부한다. 나라를 걱정하라고, 그릇된 세상에 분노하라고, 선악을 흐리지 말라고.
생각해보라. 모든 것을 잃은 뒤에도 타협과 안일을 말하는 대신 책임과 분노를 가르친 어버이를. 한 번의 실패에도 몸을 사리고 작은 손해에도 벌벌 떨며 네 이익을 위해 이웃을 잊으라고 가르치는, 그리하여 청춘의 자식을 지레 늙히는 못난 어버이들을 참으로 부끄럽게 만드는 문장이요 가르침이 아닌가.
아마 이런 기개였을 것이다. 정조가 사랑하여 곁에 두고자 한 것은. 서른둘에 스물둘의 정약용을 처음 만난 정조는 이 곧고 재주 많은 신하를 아꼈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의 뜻이 꺾이지 않도록 배려하였다.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는 인재를 얻는 것"이라며 온갖 참소에도 불구하고 신하를 지켜준 임금과, "임금님 목소리 가슴에 스몄으니 목숨 다하도록 충성을 바치리"라고 맹세한 신하는 그렇게 함께 새로운 조선을 꿈꿨다. 그러나 역사가 보여주듯 그들의 꿈은 실패하였다. 정조가 죽은 뒤 정약용은 18년간이나 유배생활을 했으며 다시는 정계에 복귀하지 못했다. 그리고 조선은 부패한 세도정치의 전횡 아래 쇠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안타까운 역사는 만약을 떠올리게 한다. 만약 정조가 자신과 왕권을 내세워 문체마저 통제하려 하는 대신 사상과 비판의 자유를 허용했다면, 그래서 드라마에서처럼 신분과 당파와 성별을 넘어 조선의 청춘들이 왕과 함께 꿈꿀 수 있었다면, 왕은 죽어도 그 뜻은 이어지지 않았을까? 역사에 만약은 부질없지만 그 가르침은 분명하다. 더 많은 자유가 더 큰 책임을 가능케 하니 권력은 자유를 막지 말며 어버이는 청춘을 가두지 말라.
김이경 소설가·독서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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