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6월 친척 형으로부터 서울 서초구의 한 동네마트인 N마트를 인수받은 한모(28)씨는 밤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매장을 새로 꾸미고 이벤트 등을 준비하는데 필요한 돈을 사채업자인 서모(48)씨에게 빌린 것이 사단이 났기 때문이다. 3,000만원을 빌려준 서씨가 “앞으로도 빌릴 돈까지 생각해 8,000만원 계약서를 미리 쓰고 돈을 못 갚으면 가게를 넘긴다는 내용도 추가하자”는 감언이설로 한씨를 꼬드긴 것이다. 막 장사를 시작한 한씨는 의욕에 넘쳐 “설마 그런 일이 있겠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장사가 되지 않았다. 두 달이 지나도록 빌린 돈을 갚지 못했고 서씨는 본색을 드러냈다. “지분 98%를 넘겨라”는 서씨의 협박에 한씨는 어쩔 수 없이 서씨가 고용한 ‘바지사장’에게 가게를 넘겨야 했다. 그리고 “3,000만원 때문에 가게를 빼앗겼다”고 한탄하던 한씨는 이틀 뒤 매장 뒤에서 목 매 자살했다. 서씨 등은 기다렸다는 듯 마트 상품을 헐값에 ‘땡처리’ 하고 가게 문을 닫았다.
한씨를 죽음으로 몰고 간 사채업자 서씨는 SSM(기업형슈퍼마켓)과의 경쟁으로 운영이 힘들고 제2금융권에서도 운영자금 대출을 받아내기 어려운 ‘동네마트’를 범행대상으로 삼은 전문 사기범이었다. 서씨가 이에 동원한 일당만 무려 17명이나 될 만큼 조직적으로 ‘동네마트 벗겨먹기’를 한 것이다. 서씨는 장사가 안 되거나, 마트를 매물로 내놓은 업주에게 접근, 마트를 빼앗거나 마트 내 물건을 ‘땡처리’하는 수법을 주로 사용했다. 이 같은 방법으로 서씨 일당이 2008년부터 올 1월까지 범행을 저지른 곳만 서울과 인천 경기 등 6곳. 모두 15억5,000여만원을 챙겼다. 이 과정에 한씨 등 피해자 두 명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마트업주와 사기성 매매계약을 하고 운영권을 강제로 빼앗은 경우도 있다. 지난해 10월 인천 부평구의 H마트를 시장에 내놓은 업주 정모(43)씨는 벼룩시장 광고를 보고 찾아온 서씨의 공범 김모(42)씨와 1억9,000만원에 매매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김씨는 계약금조차 지급을 차일피일 미루면서 조직폭력배인 이모(47)를 공동사업자로 내세워 정씨를 협박했다. 결국 이들은 매장 계산대를 장악하고 마트 내 물건을 헐값에 다른 마트에 팔아 넘겼고 정씨는 강압에 밀려 사업자포기각서까지 쓸 수 밖에 없었다. “채무를 안고 가게를 사겠다. 대신 빨리 가게를 잘 되게 해야 하니까 일단 매매계약부터 쓰자”는 말을 믿는 게 화근이었다.
경찰 관계자는 “계약 후 여러 명의 바지사장을 내세워 사업자를 계속 변경, 피해자들이 법적 조치를 취할 수 없도록 한 탓에 피해자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했다”며 “피해업주들은 오히려 서씨 등이 가로챈 물품대금과 매장 보증금 등을 고스란히 빚으로 지게 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서씨 등의 잇단 범행은 “납품한 상품을 반도 안 되는 가격에 땡처리하는 마트가 있다”는 마트 납품업자의 신고로 막을 내렸다. 수사 과정에서 서씨 일당 중 한 명이 “약속한 돈을 주지 않았다”며 범행 수법 등을 순순히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대는 이들 일당에 대해 사기와 공동공갈 등 혐의로 서씨와 김씨 등 3명을 구속하고 강모(47)씨 등 14명을 불구속 입건했다.
남상욱기자 thot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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