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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열규의 휴먼드라마] <9> 태평스런 나의 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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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열규의 휴먼드라마] <9> 태평스런 나의 6.25

입력
2010.11.02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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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그 민족적인 일대 비극의 날의 아침까지는, 아니 오전 내내 아무 기척도 없었다. 여느 일요일과 마찬가지로 한가한 태평성대였다. 늦잠 자고 늦은 아침을 먹고는 영화 구경을 갔다. 대학에 입학하면서 갓 시작한 서울살이라서 영화관 찾아 가기도 쉽지 않았다.

하숙집이 있던 성북동에서 전차를 타고는 시내로 나갔다. 중부경찰서가 있는 언저리를 여기 저기, 헤매다가 간신히 영화관 하나를 발견했다. 무턱대고 들어갔다. 서울 와서 처음 하는 영화 감상이라 감격스러웠던지 이내 작품에 푹 빠져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한창 영화 줄거리에 넋을 잃고 있는데, 난데없이 영화가 중단되었다. 장내에 방송이 흘렀다. 38선에 분쟁(紛爭)이 생겨서 문제가 커졌으니, 다들 빨리 집으로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영화관을 나서는데, 맞은 편 중부경찰서의 옥상에는 으리으리하게 차려진 기관총이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순간 오싹 소름이 끼치고 뭣인가 예감이 이상했다.

전차를 타고 창경원 앞을 지나가는데, 병사들이 탄 트럭이 몇 대, 앞질러 달려가는 게 보였다. 길거리에 서 있다가 지나가는 군용 트럭에 황망하게 올라타는 병사도 있었다. 그들은 38선으로 서둘러 가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뭔가 다급해 보였다. 예사로운 일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이 장면을 생각할 적마다 6.25 전쟁을 남한이 일으켰다는 터무니없는 일부의 주장에 침을 뱉고 싶어진다. 전쟁을 먼저 일으킨 쪽에서 병사들을 일요일 휴가를 내보내다니, 그건 말도 아니기 때문이다. )

“아! 또 분쟁인가?”승객 가운데 누군가가 그렇게 중얼댔다.

창경원 지나서 성북동 고개를 넘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낯선 비행기가 날고 있는 게 눈에 들었다. 원을 그리면서 저공비행을 하고 있는 그 모양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무서워 보였다. 순간적으로 북한의 전투기란 생각이 들었지만 확인할 길은 없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 전에도 38선에서 작은 규모의 분쟁이 더러 일어났다가는 이내 가라앉곤 하였기에 이번에도 그저 그러려니 했을 뿐이다. 전차가 성북동에 닿았을 때, 정거장 일대며 거리는 평상시와 다를 것 하나도 없었다. 그 때까지도 그저 한가한 일요일이었을 뿐이다. 저녁을 먹고는 편히 잠도 잤다.

한데 그 다음 날 아침, 밥상을 앞에 놓고는 하숙집 주인이 다급하게 말을 꺼냈다. 마침 나의 숙부님의 대학 동창생이던 분인데, “아무래도 수상해! 전쟁이 커지는 것 같아. 뒷집 중앙청 공무원 가족이 급히 짐을 싸서는 시골로 간다고 떠났어. 우리도 떠나야 할 것이야. 우선 자네가 우리 식구 데리고는 부산으로 가게나. 아니 그래야 할 것이야”라면서 나를 다그쳤다.

우리는 부리나케 짐을 챙겨서는 서울역으로 향했다. 한데 전차 정거장 가는 길에서 같은 대학에 입학한 고등학교 동창을 만났다. 그는 여느 월요일과 마찬가지로 학교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

나는 그를 다짜고짜 잡아 끌었다. “빨리 하숙집에 가서 짐 꾸려서는 서울 떠나야 돼. 전쟁이 커질 모양이야!”그리고는 아이 업은 하숙집 아주머니의 앞장을 섰다.

간신히 서울역에 도착했는데, 마침 부산으로 떠나는 기차 편이 있었다. 불문곡직, 표 끊어서는 올라탔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이게 6.25 전쟁 발발 직후 마지막 급행이었다. 그 기차 편을 놓쳤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 생각해도 끔찍하다. 우리도 피난민 행렬에 섞여서 부산까지 걷고 걸어서 가야 했을 게 뻔하다.

한데 객차 안은 붐비지 않았다. 자리도 쉽게 잡을 수 있었다. 그저 평상시의 여객 열차 안의 정경과 추호도 다를 것 없었다. 38선의 분쟁은 머나먼 남의 나라 일에 지나지 않았다.

기차가 출발해서는 미처 용산역에 닿기도 전에 좀 이상한 일이 생겼다. 내 앞 자리에 앉아 있던 대학생 같은 느낌을 주는 여성이 꾸벅꾸벅 졸다 말고는 털썩 내 무릎에 고개를 박는 게 아닌가? 나는 당황했지만 그녀는 이내 잠에 곯아떨어졌다.

그런 상태로 기차가 수원역에 닿자, 그녀는 잠이 깨었다.

“수원! 수원! 여기는 수원입니다”라는 안내 방송의 소리가 들려 왔던 것이다.

내 무릎에서 고개를 든 그녀가 멋쩍어 하면서 말했다. “아버지께서 갑자기 숨지셨다는 전보를 어제 밤, 늦게 받고는 간밤에 한 잠도 못 잤습니다.”

나는 그녀의 짐을 받아 들고는 객차의 문간까지 바래다 주었다. 그것으로 그녀를 문상(問喪)하는 셈쳤다.

그리고는 초저녁에야 기차는 무사히 부산에 닿았다. 마침 검문 나와있던 헌병이 나를 보고 수상하다고 했다. 어떻게 해서 38선 분쟁이 심해진 것을 미리 알고는 이렇게 피난 왔느냐고 따지고 들었다. 간첩 아니냐는 막말까지 해댔다. 학생증을 보이고는 겨우 풀려나서는 집으로 돌아 갈 수 있었다. 가족들은 모두 놀라서 나를 맞이했다. “용케 피해 왔구나!” 모두 그런 생각이었다.

이상이 나의 6.25 경험이다.

뮤? 6.25 그 날엔 영화를 보았다. 둘째, 다음 날 일찍 경부선 기차를 타고는 탈 없이 귀향했다. 셋째, 기차 속에서는 친아버지 초상을 당한 여학생과의 묘한 인연을 겪었다. 넷째, 부산에 닿아서는 헌병의 검문을 받았으나 곧 풀려났다.

이들 네 가지 일화 어디를 짚어 보아도 전쟁의 기미는 티끌만큼도 없다. 그저 여느 대학생 하나가 우연하게도 서울 떠나서는 부산의 집으로 기차 타고 돌아온 얘기에 불과하다. 그 이외는 아무 것도 없다.

그게 위기일발의 탈출이었다는 것은 부산 도착한 그 다음 날에야 겨우 알게 되었다. 그 네 가지 일이 한강 철교를 폭파시킨 것과 전후해서 일어난 것은 무슨 역사의 장난일까? 아무튼 나의 6.25는 태평스러웠다. 보통 대학생의 평소의 귀향길과 추호도 다를 바 없이 지극히 태평스러운 것이었다.

훗날 그 민족의 일대 비극을, 참극을 생각할 적마다, 나의 무사태평한 귀향길이 묘한 아이러니로 여겨지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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