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고도인 충남 부여 옛 시가중심지 동남리에 사비백제시대 대사찰이던 정림사 터가 있다. 지정 면적 59,245㎡로, 사적 제301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는데 이 절터에는 맞배지붕 형식의 규모가 큰 목조건물 내에 보물 제 108호로 지정된 고려시대 석불좌상이 있고 그 남쪽으로 높이 8.93m의 5층석탑이 서 있다. 이 석탑이 바로 조선시대는 물론 일제강점기까지 평제탑(平濟塔)으로 불리던 정림사지5층석탑이다.
660년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이 사비도성인 부여를 함락함으로써 사비백제(泗沘百濟)는 운명을 마쳤다. 전쟁에 참여한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이 이 탑의 1층 몸돌(塔身ㆍ탑신)에 大唐平百濟國碑(대당평백제국비)라고 제목을 달고 아울러 백제에 승리한 내용을 새겨 전승기념물로 전락시켰던 것이다. 이후부터 이 석탑은 당나라가 백제를 평정한 기념탑이라는 의미에서 평제탑(平濟塔)으로 불리게 되었다. 통일신라, 고려, 조선을 거쳐 오랜 세월을 지나오는 동안 사람들은 아무런 의심없이 이 탑을 평제탑으로 알고 그렇게 전해져 왔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인 1942년 총독부박물관에서 처음으로 절터 전역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하게 되었다. 이 때 ‘大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當草’(대평8년무진정림사대장당초)라고 새겨진 기와편이 출토되어 이 절터가 정림사였던 것을 알게 되었다. 대평 8년은 고려 현종 때인 1028년인데 이 때 대장경을 보관하는 건물에 기와를 올렸음을 알게 된 것이다. 이 유물의 출토로 그 때까지 이름 모를 절터였던 정림사가 이름을 찾게 된 것이다. 그러나 정림사라는 이름의 절이 고려시대에 분명히 존재했음은 알게 되었지만 앞서는 백제시대의 절 이름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삼국사기 기록에 나타나 있는 사비백제시대의 사찰 이름 가운데 도양사(道讓寺)라는 절의 이름이 보이는데 이름 그대로 길을 양보해서 세운 절이란 의미로 볼 때 지금까지 밝혀진 백제시대의 도로 축이 정림사지 남북 축에 맞아 이 정림사가 백제의 도양사라는 주장도 있지만 역시 확실하지 않다. 다만 사비 백제 때 정림사라고 했기 때문에 고려에 와서도 그 이름이 계속 사용된 것으로 여겨서 이후로는 백제시대부터 있었던 정림사 터라고 여겨져 내려왔다. 그렇지만 5층 석탑은 광복이 되어서도 한 동안 평제탑으로 불렸다.
이 탑이 중요한 것은 익산 미륵사석탑과 함께 백제석탑의 대표적인 조형물이라는 데 있다. 석탑은 나무로 만들어 세운 목조탑의 가구수법이 충실히 계승되면서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현존하는 익산의 미륵사탑(1998년부터 현재까지 복원을 위해 해체를 완료하고 탑의 기초 조사와 복원 설계가 진행 중이다)이 가장 충실하게 목조탑의 형태를 보이고 있다고 본다면 이 정림사 탑은 이 미륵사탑 바로 후에 건립되어 우리나라 석탑의 정형이 되고 모범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만큼 이 탑은 이후 통일신라 석탑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정림사에 대한 조사와 발굴은 최초 발굴부터 지금까지 10차례 진행되어 시대에 따른 사찰건물의 배치가 밝혀지고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백제시대의 절 이름을 알 수 있는 자료는 아직 출토되지 않아 지금도 수수께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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