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려·존중·감성의 '3중주'… 시대의 '새 길'을 열다
사회 양극화, 자원 고갈, 환경 파괴 등 한국 사회가 봉착한 갖가지 위기를 극복하는 데 여성 리더십은 훌륭한 대안이 되고 있다.
본래 여성은 통제 억압 보상 등을 수단으로 삼는 남성 권력으로부터 소외돼 존재했기 때문에 생명 가치의 존중, 약자에 대한 배려, 생태주의적 감성 등의 다른 성격을 갖게 됐다. 그런데 이런 여성성이 위기 상황에서 가치를 높여 주고 있다.
한국 사회도 예외는 아니다. 가부장적 전통문화 속에서 여성은 오랫동안 훈육과 지배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한국의 여성 리더는 살림살이 과정에서 키워 온 감수성과 돌봄의 리더십으로 이제 위기 타개의 선봉장으로 서서히 나서고 있다.
장필화 이화여대 여성학과 교수는 "과거에는 유관순 열사나 여류 정치가 박순천씨 등에서 보듯이 위기 상황에서 여성 리더십이 극소수 등장했지만 전통 질서가 자리잡으면 곧 사라지곤 했다"며 "하지만 위기 극복을 위해 다양성의 가치가 중요해진 상황이 도래하면서 여성이 경험과 지식, 관찰력을 바탕으로 지도자그룹으로 계속 통합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장 교수는 이어 "이런 리더십을 사회적으로 고무하고 제도화하는 것이 바로 가장 필요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사회 문화 분야
신혜수(60)씨는 유엔 경제사회이사회(ECOSOC) 산하 경제·사회·문화적 권리위원회 위원으로 최근 선출된 글로벌 리더다. 30여년 동안 여성인권운동을 이끌어온 그는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국제협력위원장으로 일하며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국제사회에 알렸다. 또 한국여성의전화 상임대표로 매 맞는 아내 문제를 사회문제화해 성폭력특별법 가정폭력방지법 제정의 단초를 제공하기도 했다.
서명숙(53) 전 시사저널 편집장은 프랑스와 스페인 국경의 피레네산맥을 넘는 900㎞의 도보 여행에서 영감을 얻어 2007년 제주 광치기해변에서 시흥초등학교에 이르는 15㎞의 제주 올레 1코스를 만들었다. 이후 올레는 총연장 300㎞가 넘는 생태관광 코스로 자리잡았다. 여성성에 기반한 아이디어가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문화 콘텐츠 창출의 원동력이 된 셈이다.
정치 분야에서도 비례대표 50%, 지역구 30% 이상의 추천을 여성으로 하게 하는 공직자선거법(2002년 신설ㆍ2005년 개정)의 힘에 따라 여성 의원이 소폭 증가세다. 2008년 총선에서 뽑힌 의원 299명 가운데 여성은 41명으로 13.7%에 달했다. 이는 2000년 16대 국회(여성 의원 비율 5.9%)의 2배에 이르는 수치. 하지만 여전히 선진국에 비해 미미한 숫자다. 유엔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적으로 여성 의원 비율은 평균 17%에 달했으며 비율이 30% 이상인 국가도 23개국이나 됐다.
경제 분야
아줌마로서의 정체성을 무기로 창의성을 발휘한 리더십도 있다. 한경희(46)씨는 가사노동을 통해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서서 쓸 수 있는 스팀청소기 아이디어를 갖고 1999년 한경희생활과학을 창업했고 2001년 제품을 출시해 2005년 연매출 1,000억원대에 이르는 중견 기업으로 키웠다. 이 회사는 이후 스팀다리미 등을 내놓고 미국 등 해외시장에도 진출했다.
윤여순(55)씨는 지난해 LG그룹 내 첫 여성 전무로 발탁됐다. LG인화원에 근무하는 윤 전무는 경제 위기 상황에서 사이버교육 등으로 사내 교육프로그램을 혁신할 것을 주장하다 반대에 부딪혔지만 계열사 교육담당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설득하는 여성적 커뮤니케이션 능력으로 사내 MBA코스 등의 개발을 주도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국 기업에서 여성의 세는 여전히 미미하다. 취업포털 인쿠르트에 따르면 지난해 대기업(종업원 300명 이상) 임원(2,474명) 가운데 여성은 9.1%(126명)에 불과했고 중소기업은 8.9%에 그쳤다.
김청환기자 chk@hk.co.kr
■ 軍·警에도 우먼파워
서울 마포경찰서 강력계장 박미옥(41) 경감은 여경의 전설이다. 22년 형사 경력 가운데 약 18년을 강력계에서 활동했다. 그는 희대의 탈주범 신창원 사건(1999년) 등 굵직한 사건들을 해결하며, 순경에서 경위까지 모든 직급을 특진으로 9년 만에 초고속 승진했다. 최초의 서울경찰청 여자기동수사대 반장을 지내기도 한 박 경감은 올해 2월부터 마포서 6개 강력팀과 마약팀 형사 35명을 지휘하고 있다.
2002년 국내 최초의 여성 전투기 편대장이 된 공군 박지연(31) 소령. 박 소령은 97년 여성 최초로 공군사관학교에 입교하고 올 10월에는 공군사관학교 동기 6명과 함께 첫 여성 공군 소령으로 진급하는 등 뭐든 공군 1호다. 전투기 4기로 구성된 편대를 지휘하려면 조종실력은 물론, 고도의 판단력과 통솔력까지 갖춰야 하고 이수해야 하는 주기종 비행시간도 400시간에 이르지만 도전을 즐기는 그에게는 힘든 일이 아니다.
경찰과 군에서도 뛰어난 육체적, 지적 능력으로 발군의 기량을 선보이는 여성 리더들이 증가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말 약 10만명의 경찰관 중 여경은 6,566명(6.3%)으로 2005년 4.1%, 2007년 5.7%에 이어 꾸준히 늘고 있다. 박 경감은 "20년 전만 해도 여경은 단기수급계획에 따라 극히 제한된 숫자만 선발했고, 할 수 있는 일이 한정돼 있었지만 지금은 능력만 있다면 강력계 특공대 외사계 등 전 분야에서 활약할 수 있다"며 "직원들이 여성 상사를 예전보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고 말했다.
경찰청도 이 같은 여경들의 활약상을 감안해 2005년부터는 승진 시 여경을 우대하는 여경승진목표제를 도입해 총경 경정은 승진 대상 인원의 30%, 경감은 10%등을 여경에게 별도 배정하고 있다. 앞으로도 매년 경찰관 충원 인력의 20~30%를 여경으로 선발해 비율을 10% 이상으로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국방부도 비슷한 대책이 있다. 향후 10년간 여군 장교를 현재 4.3%에서 7.7%로 늘리고 여군 부사관은 전체의 2.9%에서 5.5%선으로 늘리겠다는 계획을 올 9월 밝혔다. 김양희 젠더앤리더십(양성평등 교육 기관) 대표는 "남성 위주의 조직 자체가 유연해지는 가운데 여성의 섬세한 소통 능력이 인정받으면서 여성 리더가 두각을 나타내는 기회가 많아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김혜영 기자 shine@hk.co.kr
■ 기고/ 젠더를 넘어서는 글로벌 리더십
글로벌 리더십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21세기 새로운 리더십의 중요한 과제를 '젠더(gender)로부터의 초월'로 보고 있다. 남녀를 뛰어넘는 리더십, 얼핏 이해가 쉽지 않지만 잘 살펴보면 결국 앞으로 글로벌 리더십에는 지금과는 많이 다른 덕목이 필요하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
그간 지구는 좀더 편리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성장 발전 효율성 등의 가치를 추구해 왔고, 이를 주도할 남성적 카리스마를 가진 지도자를 끊임없이 요구해 왔다. 그러나 최근 지구촌을 관통하는 큰 줄기는 환경을 해치지 않고 장기적으로 잘 살아남을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 가치와 기업의 사회적 책임성(CSR), 다양한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의 형성 등으로 바뀌고 있다. 경쟁이 아닌 상호 협력의 필요성, 개인주의가 아닌 공동체 가치를 위한 헌신, 균형 있는 발전을 위해 사회적 책무를 다하는 열린 마음 같은 것들이다. 헌신 배려 화합 등 보다 여성적 덕목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는 얘기다.
실례로 최근 미국 MIT 실험실에 여성이 많아지고 있다. 여성의 세심한 감성적 테크놀로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제품 사용자의 심리적 특성을 감안한 설계 능력, 친환경적 제품 개발을 위한 배려 능력, 구성원이 공동 작업할 때 꼭 필요한 소통 능력 등이 그것이다. 21세기 기술의 방향과 디자인은 그 어느 때보다 사람 중심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여성의 능력이 각광받을 수 있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학자들은 이미 최근 글로벌 리더들이 기부, 환경 문제 등에 대한 관심을 통해 이러한 소통을 시작했으며 그것이 21세기 글로벌 환경의 변화를 이끌어 내는 중요한 힘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고 진취적이고 도전적인 남성 리더십이 앞으로 소외되는 것은 아니다. 그 힘은 사회변혁의 도구로 여전히 강한 게 현실이다.
이제는 젠더를 초월해야 한다. '우리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닌(non nobis solum)'이라는 라틴어 문장에서 보듯 모두가 잘 살기 위한 지구 전체의 노력이 시작돼야 한다. 그 힘은 남성적, 여성적 리더십이 함께 발전하는 데서 나온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남녀라는 특성을 고루 활용하고 결국은 초월할 수 있을 때 그 리더십은 지구를 더 따스하고 풍요롭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부경희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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