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아침 신문에서 한국일보 자매지 코리아타임스의 개헌 관련 여론조사 결과가 눈길을 끌었다. 먼저 개헌에 찬성한다는 응답이 39%, 반대가 23% 로 나온 게 흥미롭다. 언뜻 다수 여론이 개헌의 당위성에 수긍하고 있다. 그러나 '모르겠다'와 무응답이 38%나 되는 걸 보면, 구체적 개헌안과 일정도 제시하지 않은 채 개헌 찬반을 묻는 게 큰 의미가 있을까 싶다. 이걸 염두에 두고 내용을 살펴야 옳을 듯하다.
개별 문항 응답에서 두드러진 것은 정치권 학계 시민단체 언론 등 여론 주도 집단의 개헌 논란과는 많이 다른 점이다. 우선 지금 정부에서 개헌하는게 좋겠다는 의견이 49%나 된다. 집권 후반기 정부가 개헌을 추진하는 것은 여러모로 버겁고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이 여론 주도층에 우세한 듯한 분위기와 차이가 있다.
정치권 논란, 여론과 동떨어져
정치권 속사정은 잘 모르지만, 개헌에 올인 한다는 이재오 특임장관 같은 이는 더욱 신명 낼 만하다. G20 회의 뒤 공론화를 다짐한 안상수 한나라당 대표 등 친이 주류도 힘이 날 법 하다. 며칠 전 리얼미터 여론조사도 현 정부 임기 내 개헌 찬성이 38%로 가장 많았다.
그러나 개헌 추진세력이 반색할 대목은 얼추 거기까지다. 기본권 조항을 비롯한 전면적 개헌을 지지한 의견(62%)이 대통령 단임제를 바꾸는 개헌으로 충분하다는 의견(32%)보다 훨씬 많은 사실은 양면성이 있다. 그와 달리, 권력구조와 관련해 현행 대통령제(36%)나 4년 중임제(34%)가 좋다는 의견이 의원내각제(12%)와 이원집정부제(4%) 지지보다 월등히 많은 사실에는 머쓱할 만하다. 리얼미터 조사도 대통령 4년 중임제(39%)와 5년 단임제(23%) 지지가 의원내각제(11%)나 분권형(6%) 지지보다 훨씬 높다.
정치권 등의 적극적 개헌론자들은 이원정부제 또는 분권형 대통령제를 주장하는 경우가 많다. 이에 비해 여야의 잠재적 대권 주자들은 대통령 중임제 개헌이라면 모를까, 권력구조 자체를 분권형으로 바꾸는 개헌에는 반대한다. 이미 몇 발짝이든 앞서 달리는 대권 마라톤을 그만두고, 2인3각 달리기처럼 불편하기 짝이 없는 새로운 경주에 나서는 것을 반길 리 없다. 분권형 개헌론은 그처럼 마라톤 주자들에게 발목 묶고 달리기를 하자고 떠드는 소리로 들리기 십상이다.
이런 물정과 사리를 유권자들도 잘 알기에, 정치권의 개헌 추진이 국민의 미래를 위한 것(37%)이기보다 정치적 이익을 위한 것(55%)으로 보는 이가 많을 것이다. 애초 진정성을 의심 받는 형편에 어떤 고상한 명분을 앞세우든 개헌에 올인 하는 의미와 쓸모가 있는지 의문이다. 정치세력의 무궁무진한 책략과 이해타산까지 애써 헤아릴 생각은 없다. 적어도 개헌에 관해서는 어떤 정치세력의 교묘한 궁리보다 주권자인 국민의 지혜와 의지가 압도적으로 우월하다고 믿는다.
다만, 다수 여론이 지지하는 듯한 전면 개헌은 이미 때를 놓친 듯하다. 기본권 영토 경제조항 등에 관해 다양한 이념적 스펙트럼에 따라 백화제방(百花齊放)식으로 제기될 주장을 수렴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는 정권 초기 여야 의원 180여명이 참여한 개헌 논의에서도 더러 느꼈다. 특히 정치인도 아닌 전문학자들이 엄밀한 학문적 근거와 논리가 취약한 극단적 주장을 쉽게 늘어놓는 모습에서 말 그대로 국가와 국민의 미래를 위한 개헌에 필요한 사회적 합의를 이루기 어렵겠다는 인상을 받았다.
국민적 합의에 먼저 충실해야
주제 넘은 생각일 수 있다. 그러나 국회와 시민단체 등의 개헌 논의에 참여한 학자들이 분권형 대통령제의 모델인 프랑스 제5공화국 헌법의 역사적 배경과 경험을 실제와 사뭇 다르게 설명하는 것에 놀랐다. 이런 정치사회 현실에 비춰 볼 때, 굳이 지금 개헌을 한다면 일찍부터 대체로 국민적 합의로 간주한 대통령 중임제 개헌에 그칠 수밖에 없으리라고 본다.
개헌은 본디 지금 세대를 위한 안정과, 미래 세대를 위한 변화를 함께 꾀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원칙과 사리를 벗어난 이상야릇한 개헌 논의부터 삼갈 일이다.
강병태 논설위원실장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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