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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익명의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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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익명의 예술

입력
2010.11.01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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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철이나 건물에 그림을 그리는 그래피티는 영국에서 불법이다. 그래도 많은 젊은이들이 도시 곳곳에 몰래 그림을 그린다. 뱅크시도 그 중 한 사람이다. 뱅크시의 얼굴을 아는 사람은 없다. 뱅크시라는 이름도 가짜다. 고등학교를 퇴학 맞은 1974년생 남자라는 것 외에 알려진 게 없지만 2007년 KBS가 다큐멘터리를 제작해 방영했을 만큼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2003년, 뱅크시는 런던 대영 박물관 고대유물 전시장 벽에 손바닥 크기의 넙적한 시멘트 덩어리를 몰래 붙여 놓았다. 화살이 박힌 들소와 쇼핑카트를 미는 사람이 유성 펜으로 그려진 시멘트 조각은 선사시대 유물을 흉내 낸 것이다. 이 가짜 유물은 8일 뒤 뱅크시가 박물관에 알려줄 때까지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

뱅크시에게 익명성은 박물관에 가짜 작품을 걸거나 불법 그래피티 작업을 하기위한 것이지만, 동시에 기성질서의 가치와 권위에 이의를 제기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나는 이 민주주의 사회에서 더 이상 누구도 믿지 않는 자유 평화 정의 같은 것들을 적어도 익명으로 부르짖을 정도의 배짱은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27세의 프랑스 청년이라고만 알려진 익명의 거리 예술가 JR은 브라질의 빈민촌이나 분쟁지역 중동에서 대형 흑백인물 사진을 건물에 붙이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그가 위험지역에서 작업하는 이유는 예술이 불가능한 곳에 예술을 가져감으로써 그 지역의 상황에 대한 질문을 생산하고 긴장을 누그러뜨리기 위해서다. 실제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분리 장벽에 붙인 우스꽝스러운 표정의 인물 사진들은 긴장된 분위기를 익살스럽게 바꾸어 놓으면서 이 벽의 정치적 의미를 재고하게 한다.

JR은 최근 국제 컨퍼런스 TED의 2011년 수상자로 선정되어 이목을 끌고 있다. 예술을 통해 박애주의를 펼치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도록 사람들에게 영감을 준 것이 수상 이유다. 그는 상금 10만 달러와 더불어 내년 2월 미국 캘리포니아 컨퍼런스에서 세상을 바꾸는 소원을 말할 기회를 갖게 된다.

작가들이 익명을 택하는 이유 중 하나는 창작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다. 며칠 전에 만난 어느 시인도 그랬다. 그는 자신의 시집이 잘 팔리는 것이 싫다고 했다. 화폐가치로 환산되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시장에 구속되느니 익명으로 마음껏 창작의 자유를 누리고자 한다. 그와의 만남은 자유를 추구하고 창의적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 예술가의 본분이었음을 상기 시켰다.

익명의 예술은 우리 시대 카운터컬처다. 주류 문화에서 일탈한 하위 문화로 취급되던 카운터컬처에 대해 최근 새로운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켄 고프먼과 댄 조이는 그들의 책에서 기성질서에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카운터컬처가 인류 역사를 이끌어 온 창조적 원동력이라고 했다. 카운터컬처의 역사에는 인간을 위해 신들에게서 불을 훔친 프로메테우스나 알렉산더 대왕에게 햇빛을 가리지 말라고 했던 디오게네스 같은 유명한 바보들도 등장한다.

모두 다 유명해지려 하는 기명(記名)의 세상에 익명의 예술가들은 그 출현만으로도 참신하다. 낙후된 동네를 찾아 벽화를 그리는 공공 예술가들, 쇠락한 재래시장 활성화에 나선 젊은이들, 거리의 그래피티 아티스트 모두 자신의 이름 대신 창작의 자유와 예술 자체를 택한 작가들이다. 그 익명의 카운터컬처 작가들에 의해 현대미술은 비록 일부이긴 하지만 예술의 순수성을 되찾고 있다. 예술은 본래 자유를 토대로 다양성을 추구하고 인간주의적 가치를 구현하는 활동이다.

전강옥 조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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