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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의 시로 여는 아침] 어떤 아름다움을 건너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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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의 시로 여는 아침] 어떤 아름다움을 건너는 방법

입력
2010.11.01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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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률

생각보다 꽤 추운 곳을 지나서 흘러를 간다 낭송의 밤 속으로 들어를 간다 우리는 즐거워야 하므로 서로에게 붙들려야 한다

앞 못 보는 사람들 속에서 암송을 듣는다

눈,이 내릴 것 같다

낭송의 힘으로 더 이상 눈이 아프지 않기로 하면서 다음 차례의 생에서는 한 움큼의 기적을 눈에 넣기를 바라며 낭송에 몰입하느라 그 밤 모두 눈이 멀기로 했다

낭송회는 밤늦도록 끝나지 않았다 창밖으로 눈,이 나렸다

내 몸 위에는 한 번도 쌓이지 않아서, 눈,

내 품에 들어온 당신 품에 웃음처럼 쌓이지 못해서, 눈,

아, 바다 위에도 쌓이지 않아서, 눈,

눈,은 자체로 전율이어서 고통인 온도여서 몸이 아니라서 내 몸에도 바다에도 쌓이지 않기로 하였다

그러니까 세상 모든 그날들을 닮은 눈,

눈,이 저 형국으로 닥쳐오는 것은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차굽게 오는 것도 맹인의 눈 속으로 내리는 것도 다 용서하겠다는 것인가 우물쭈물하는 물질들의 등을 떠다밀며 마음의 빚진 것들을 갚게 하는, 눈, 눈,의 행진은 밤새도록 끝나지 않았다

나는 두 눈으로 오늘 내린 눈,을 받았다

● 몇 년 전 함부르크에 갔을 때, 길을 걸어가다가 별 생각 없이 ‘어둠 속의 대화’라는 전시를 관람했습니다. 그건 시각을 제외한 다른 감각기관을 이용해 빛이 차단된 전시장에 재현한 거리, 카페, 숲길 등을 관람객들이 체험하는 전시회였습니다. 저도 지팡이에 의지해 안내인의 지시만 들으며 더듬더듬 앞으로 나갔습니다. 눈을 감은 세계는 온갖 소리와 다양한 촉감의 표면으로 이뤄져 있더군요. 소리와 냄새와 바람은 날벌레들처럼 제게 와 부딪혔습니다. 어쩌면 눈을 감는 게 오히려 진실을 더 잘 아는 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올 겨울의 할 일은 두 눈을 감고 눈을 맞는 일. 어쩌면 처음 눈을 맞을 때로 돌아갈 수도 있겠습니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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