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살의 아버지는 생후 100일 밖에 안된 갓난쟁이 아들을 뒤로한 채 국군에 입대했다. “나 갔다 오마”라는 짤막한 말만 남기고 집을 나섰다. 곧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으리라. 그렇게 60년의 세월이 훌쩍 지나갔다.
30일 금강산 이산가족상봉장에서 만난 북측 아버지 리종렬(90)씨와 남측 아들 민관(61ㆍ남측 이름 이명관)씨. 어느덧 백수(白壽)를 바라보는 아버지는 한쪽 눈의 시력을 잃고 부축을 받아야 할 만큼 건강이 악화돼 있었다. 북측 의료진이 그의 건강상태를 수시로 체크할 정도였다. 반백의 노신사가 된 아들은 그런 아버지를 뵙자마자 “돌아가신 줄 알아 제사까지 모셔왔다”며 흐느꼈다. 아들과 동생들을 한꺼번에 만난 충격이 컸던 탓일까 리씨는 한참 뒤에야 무겁게 말문을 열었다. “너를, 네 어미를, 우리 가족을 60년간 하루도 잊어본 적 없다.”
어느 사연인들 절절하지 않을까. 남측 최고령자 김례정(96ㆍ여)씨는 북쪽의 딸(우정혜ㆍ71)과 재회했다. 1995년 대한적십자사에 상봉을 신청한지 15년 만이었다. 시종일관 “긴장은커녕 좋기만 하다”고 밝게 웃던 김씨였지만 막상 딸을 보자 “너를 어떻게…, 꿈에서만 보고…”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반면 정혜씨는 자신을 얼싸안은 어머니에게 “울지 말라”며 미리 챙겨온 훈장과 상장 등을 내보였다. 북에서 잘 지내고 있다는 점을 알리려는 듯했다.
60년 전 맨발로 전장(戰場)으로 떠난 오빠를 위해 여동생들이 마련한 조촐한 선물 전달식도 열렸다. 상봉 행사 이틀째인 31일 북측 오빠 정기형(79)씨에게 기영(72) 기옥(62) 기연(58)씨 등 남측의 세 여동생들은 털신과 가죽신 등 신발 네 켤레를 건넸다. 당시 헌신을 신고 인민군 짐꾼으로 나선 기형씨는 중도에 신발을 잃어버렸고, 그 소식을 전해들은 부모는 죽는 날까지 맨발의 아들을 한으로 여겼다고 한다. 기형씨는 “다리가 끊겨 가족에게 돌아가지 못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남북 가족들은 이날 숙소인 금강산호텔에서 2시간여의 개별 상봉을 갖고 공동중식, 오후 단체 상봉을 이어갔다. 켜켜이 쌓인 이산의 한을 달래려는 듯 양측 가족들이 준비한 특별한 선물들도 다수 눈에 띄었다. 남측 윤상호(50)씨는 북측 작은아버지 재설(80)씨가 선물한 목공예품 두 점을 받았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남쪽 고향인 경기도 광주 고향집을 장독대, 돼지우리, 장작더미까지 그대로 재현한 작품이었다. 전쟁 당시 폭격으로 죽은 줄만 알았던 북측 언니 송완섭(78)씨를 마주한 남측 동생 미섭(74)씨는 지난 세월이 야속했던지 구식 태엽시계만 5개를 준비했다. 짧은 만남을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 폴라로이드(즉석) 카메라로 서로의 모습을 담는 가족도 있었다.
남북 이산가족은 행사 마지막날인 1일 오전9시부터 한 시간 동안 금강산 이산가족면회소에서 작별상봉을 갖고 2밖3일간의 상봉 일정을 마무리한다.
금강산=공동취재단 김이삭기자 hir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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