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힌샘 주시경(周時經, 1876~1914)은 갑오경장 이후에 일어난 애국운동과 우리말 우리글의 보급과 연구에서 가장 두드러진 노력을 기울인 국어학자이며, 사상가였다. 우리 글 정음(正音)을 ‘한글’이라고 이름 붙인 이가 그이며, 우리 문법 연구의 길을 열고, 우리 말ㆍ글의 연구와 보급에 앞장서서 청년 학도를 길러낸 분이다. 국어 연구의 제1세대인 장지영, 권덕규, 김두봉, 신명균, 최현배, 김윤경, 이병기 등을 키워낸 이가 바로 ‘주보따리’ 한흰샘 선생이다.
황해도 봉산(鳳山)에서 태어나 서울에 와서 배재학교에서 공부하고, 독립신문의 교정을 맡아보면서 배재학교 등 수십 곳을 돌며 한글을 가르쳤고, 국문동식회(國文同式會)를 만들어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 한글학회로 발전할 기틀을 만든 국어 연구, 국어 보급, 국어 사랑의 전도사였다. 갑오경장 뒤에 정부의 학부(學部) 안에 둔 국문연구소의 중심인물이었고, (1908) 등 책을 지어 국어연구에도 앞장섰다.
“하늘이 그 구역에 그 인종이 살기를 명하고, 그 인종에 그 말을 명하여, 한 구역의 땅에 한 인종을 낳고, 한 인종의 사람에 한 가지 말을 내게 함이라. 그러므로 하늘이 명한 성을 따라 그 구역에 그 인종이 살기 편하며, 그 인종이 그 말을 내기에 알맞아 천연(天然)의 사회로 국가를 만들어 독립이 각각 정해지니, 그 구역은 독립의 터전[基]이요, 그 인종은 독립의 몸[軆]이요, 그 말[言]은 독립의 성(性)이다.”(, 박종국 참조)
나라 말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서고, 그 말은 독립의 바탕이라는 굳은 믿음은 그의 투철한 사상이었다. 그리고 융희 원년(1907) 여름에 상동(지금 남창동) 청년 학원에서 ‘제1회 하기 국어 강습소’를 차린 것을 시작으로, 융희3(1909)년 수송동 보성중학교(지금 조계사)에 일요학교 ‘한글모(조선어 강습소)’를 차려 1914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열과 성을 다하여 이끌었다.(참고) 한힌샘은 언제나 검소한 무명 바지저고리에 두루마기를 걸치고, 늘상 책 보따리를 들고 다녀서, ‘주 보따리’라는 별명으로 통했다고 한다. 혹은 한글만 쓰기를 주장해서 학생들이 주선생의 이름, 두루 주(周) 때 시(時), 글 경(經)을 풀어서 “두루 때 글” 선생이라고 불렀다는 일화도 전한다.
주시경은 나라와 민족의 정신인 한글을 소홀히 하고 한문 배우기에 반생을 허비하는 우리 교육의 현실이 안타까워, 한글 펴기에 전심하다 마흔도 못 되는 나이에 돌아갔다. 북한은 그 제자 김두봉 등이 앞장서서 순수 한글문화를 이루었다. 남한은 옛날 한문 자리에 영어가 차고 앉아 우리말 우리글이 한문 시대보다 더한 수난의 세월이다. 영어 몰입교육으로 자발적 문화 식민지가 된 현실에서 최근에는 ‘한글·김치·한복’과 더불어 세계에 한국을 알리는 대표적 문화 자산인 태권도가, 한국 사람이 총재인 세계연맹에서 공식용어를 영어로 바꾸었다는 태권도인의 눈물의 한탄이 울려 퍼졌다. 다시 한힌샘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 구역은 독립의 터전이요, 그 인종은 독립의 몸이요, 그 말은 독립의 성(性)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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