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할 것은 다했습니다. 좋은 분들과 인연을 맺으면서 즐겁게 일해 왔기에 (저는) 정말 복이 많은 사람입니다.”
라응찬 신한금융지주 회장이 지난 30일 열린 신한 이사회에서 자진 사퇴를 하며 밝힌 소회다.
상고(선린상고) 야간학부가 전부인 학력으로 설립 당시 4개 지점, 직원수 270명에 불과했던 미니은행인 신한은행을 28년 만에 자산 규모 310조원, 직원수 1만7,500명의 초대형 금융그룹으로 변모시킨 입지전적인 CEO. 하지만 신한금융 경영진 내분, 그리고 실명제 위반까지 드러나면서 옷을 벗어야 했다. 뱅커(은행원) 생활을 시작한 지 51년, CEO로 취임한 지 19년만이다. 우리나라 은행권의 ‘살아있는 신화’로서, 이보다 참담한 퇴장은 없다는 게 금융권의 한결 같은 평가다.
라 회장은 경북 상주 출신으로, 옛 농업은행(농협)과 대구은행을 거쳐 1977년 재일동포들이 설립한 단자회사인 제일투자금융에 스카우트됐다. 당시 라 회장은 이곳에서 은행설립 준비위원회의 실무총괄을 맡으며 82년 신한은행의 설립을 주도했다.
91년 은행장에 선임되면서 ‘상고 출신 행장’신화를 만든 그는 이후 탁월한 경영성과를 거두며 신한은행이 여타 시중은행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라 회장이 은행장 3연임을 하는 동안 신한은행은 총자산이 10조원에서 45조원으로, 지점수도 115개에서 336개로 늘었다. 한 은행권 인사는 “재일동포 주주들에 대한 절대적 충성을 통한 두터운 신임, 철저한 조직관리, 소매고객 중심의 수익중심 경영, 이 세 가지야 말로 ‘라응찬식 경영’의 성공비법”이라고 말했다.
2001년 지주회사 설립 이후 라 회장의 입지는 더 두터워졌다. 2002년 굿모닝증권(현 신한금융투자), 2003년 조흥은행(신한은행), 2006년 LG카드(신한카드)를 잇따라 인수하며 신한을 국내 최고의 금융그룹으로 성장시켰다. 금융권 판도를 뒤바꾼 대형 M&A에서 한번도 패하지 않으며 ‘신산(神算)’이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특히 조흥은행 인수 후 성공적 통합 과정은 일명 ‘신한웨이(Shinhan way)’로 불리며 미국 하버드 경영대학원(MBA)의 교재로 사용될 만큼 해외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라 회장에게선 ‘이상 조짐’이 감지되기 시작했다. 지난해 ‘박연차 게이트’ 수사에서 라 회장이 태광실업 박 회장에게 50억원을 전달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그는 일생일대의 최대위기를 맞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로 검찰수사가 중단되면서 라 회장도 함께 고비를 넘기는 듯 했지만 올 들어 실명제 위반 문제가 다시 제기되고, 결국 금융당국의 중징계 통보까지 받으며 그의 CEO 생명에 치명적 타격을 주고 말았다.
라 회장에 대해 비판적인 일각에선 2인자를 좀처럼 키우지 않는 그의 독선적 스타일이 결국 스스로의 명을 단축시켰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라 회장 밑에서 2인자로 거론되던 이들은 대부분 불명예 퇴진의 길을 걸었다. 조흥은행 합병의 1등 공신으로 그룹내 2인자 자리를 굳혔던 최영휘 전 사장은 경영상의 이견으로 라 회장 지시를 거부했다가 결국 ‘축출’당했다. 신상훈 사장 역시 6년간 은행장으로 재직하다 지난해 2월 지주사장에 오르며 ‘100% 차기 회장’으로 거명됐지만, 거꾸로 고소를 당하는 상황을 맞았다. 신한 사정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라 회장이 올 초 4연임을 포기했어야 했다. 본인의 욕심 때문이었든지 아니면 다른 사정이 있었든지 어쨌든 그 때 그만두고 신 사장에게 대권을 넘겨줬더라면 이 지경까지 오지는 않았을 것”라고 말했다.
라 화장에 대한 평가는 “신한을 만들어낸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의 뱅커”에서 “지분 하나 없이 오너보다 더한 권한을 휘두른 제왕적 CEO”까지 다양하다. 하지만 결국은 ‘물러나야 할 때’를 놓친 것이, 그의 50년 뱅커 인생에서 최대의 실수였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손재언기자 chinas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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