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급쟁이 십일년 만에 내 집을 하나 장만하게 된 감격스러움이야 어찌 필설로 다 이르겠는가. 내 집 갖기 작전의 순 자기자본 일금 일백삼십만 원의 거금을 만들기까지 겪어 온 파란곡절은, 아내 말마따나 참말 치사하고 더러워서 돌이켜보고 싶지도 않다."
1974년 '문학과 지성' 봄호에 발표된 조선작의 단편소설 의 도입부다. 주인공은 서른일곱 살 가장이다. 서울 제기동의 한옥집 문간방에서 30만원 전세로 시작한 그는 11년 간 모은 130만원으로 은행 융자 90만원을 낀 260만원 짜리 집을 장만한다. 대지 34평에 건평 19평, 가운데 마루를 두고 작은 방 네 개가 빙 둘러 있는 집인데, 지붕 위로 고압선이 지나간다. 모자란 돈 40만원은 건넌방과 문간방 두 개를 전세 내주고 해결한다.
국민 10명 중 4명은 셋방살이
산업화가 시작된 이래 수십 년 동안 한국인들이 내 집을 마련해 온 전형적인 방식이다. 과거의 셋방살이는 아파트나 다가구 주택 등의 독립된 공간에서 생활하는 지금의 전세와는 달랐다. 매일 집주인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곁방살이였으니, 주인공이 이리 한탄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셋방살이 주제에는 아내와 나의 방사도 건숭건숭이게 마련이었다. 혹시 이 깊은 밤중까지도 주인집에서 잠들지 않고 우리들의 기척을 엿듣는 것이 아닐까 싶어, 괜스레 초조하고 조바심이 나서 영 형편없는 작업이 돼버리기가 십중팔구였는데…."
셋방살이를 전전하는 설움이 워낙 크다 보니 내 집 마련은 필생의 꿈이자 소중한 자산 증식 수단이었다. "내가 저축을 늘려가는 비율보다 부동산가격은 항상 앞질러 저만큼 달리고 있어서" 빚을 내서 집을 사더라도 손해 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강산이 세 번도 더 변한 요즘, 세입자의 삶은 조금 나아졌을까. 우리나라 사람 10명 중 4명은 지금도 셋방살이 신세다(2005년 인구주택 총조사 결과). 전세가 356만 가구(약 1,000만명), 월세와 사글세가 300만 가구(약 660만명)에 달한다. 한데 집값이 너무 비싸 1970년대처럼 37세에 내 집 마련은 꿈도 꿀 수 없다. 28세에 직장생활을 시작한 대한민국의 평균 월급쟁이가 서울에서 110㎡(33평)형 아파트를 장만하려면 아무리 근검절약해도 57세가 돼야 한다. 강남의 아파트를 사려면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72세는 돼야 한다.
더욱이 셋방살이 가구의 83%는 전ㆍ월세 보증금 5,000만원 미만인 서민들이다. 이들이 서울에서 집을 장만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나머지 17%도 자기 돈으로 집을 살 여유는 없다. 결국 수억 원의 은행 융자를 받아야 내 집 마련이 가능한데, 저출산ㆍ고령화 여파로 예전처럼 집값이 꾸준히 올라줄 가능성이 희박한 만큼 굳이 빚을 내서 집을 살 이유는 없다.
그러니 요즘 셋방살이 서민들의 꿈은 내 집 마련이 아니라, 저렴하고 안정적으로 생활할 수 있는 전ㆍ월세 주택의 확보다. 문제는 전셋값 오름폭이 집값보다 크다는 점이다. 국민은행에 따르면 1986년부터 2008년까지 주택 매매가격은 125% 오른 반면, 전셋값은 263%나 치솟았다. 최근 주택 수요가 줄면서 전셋값 오름세는 더욱 가파르다. 특히 서민들이 선호하는 중ㆍ소형 아파트의 전셋값 상승이 두드러진다. 집값 하락과 저금리 탓에 집주인들이 전세를 월세로 바꾸는 경우가 늘어나 세입자의 주거 부담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분양 위주 주택정책 바꿔야
세입자들이 집을 살 여력이 없고 집을 소유하고픈 욕구도 줄었다면, 내 집 마련의 기회를 늘리는 데 초점을 맞춘 정부의 주택정책도 바뀌는 게 옳다. 장기 전세주택과 공공임대주택의 공급을 늘리고, 건설사들의 미분양 물량을 전세로 전환하는 정책도 강구해야 한다.
하지만 정부 정책은 거꾸로 가고 있다. 수조 원의 국가 재정으로 미분양 아파트를 사주는가 하면, 오로지 분양 아파트를 늘리는 데 열심이다. 전세대란에는 눈을 감은 채 금융 규제를 풀어 빚을 내서 집을 사라고 유혹하는 게 다름아닌 8ㆍ29 대책이다. 과거 집 없는 사람들은 곁방살이의 설움을 10년만 견디면 내 집을 살 수 있었지만, 요즘 세입자들은 과다한 임대료를 견디지 못해 반지하ㆍ쪽방ㆍ비닐하우스 등 더 작고 열악한 집으로 쫓겨나고 있다.
고재학 논설위원 goindo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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