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통 같은 사실이라고 믿는 게 실은 쉽게 허물어지는 모래성이라는 거죠. 독자들이 이를 비판적으로, 다면적으로 보는 방법을 배웠으면 좋겠어요.”
반(反)신자유주의의 최전방에 서 있는 경제학자인 장하준(47)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경제학의 우상 파괴자다. 그가 망치를 들고 무너뜨리려 하는 것은 ‘시장 자유주의가 최선’이라는 경제학의 오래된 믿음이다. 지난 달 초 영국에서 출간돼 현지 언론들로부터 극찬을 받은 그의 신간 도 자유무역 확대, 주주가치 증진, 금융규제 완화, 부자감세 등 신자유주의의 교리가 얼마나 근거 없는 것인지를 구체적 사례를 들어 뒤집고 있는 책이다.
28일 이 책의 한국어판 출간(부키 발행)에 맞춰 귀국해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장 교수는 “경제이론으로 ‘증명된 사실’이라는 게 얼마나 ‘사실이 아닌지’를 독자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다”며 “시민들이 경제정책에 대해 적극적으로 판단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이 책이 도움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우상 파괴의 망치를 독자들과 나눠 갖겠다는 것이다. 그는 “경제학의 95%는 상식을 일부러 복잡하게 만든 것이고, 나머지 5%도 기본논리로 설명하면 다 알아들을 만한 얘기”라고 덧붙였다.
책은 23가지의 테마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와 ‘이런 말은 하지 않는다’라는 항목을 대비시켜 신자유주의의 주장과 거기 대한 반박을 간결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했다. ‘자유시장이라는 것은 없다’ ‘자유시장 정책으로 부자 된 나라 없다’ 등 자신이 기존에 주장해온 것들을 신랄하고 풍성한 사례로 풀어낸다. 그가 대중적 교양서로는 이후 3년 만에 낸 책인데, 그 사이 터진 글로벌 금융위기로 신자유주의의 문제점이 확연히 드러나면서 그의 목소리도 더욱 힘이 붙은 듯했다.
그는 최근 한나라당 내에서 분란을 일으키고 있는 부자감세 철회 문제에 대해 “부자감세는 자유시장적 스탈린주의”라고 한 마디로 잘라 말했다. 스탈린이 집단농장 정책으로 농업 부문의 잉여를 제조업에 몰아준 정책을 빗댄 것이다. 그는 “스탈린은 그래도 투자라도 했지만, 부자들에게 돈을 몰아줘봐야 투자도 안 한다”며 “미국 등에서는 부자감세 후 투자와 성장이 더 떨어졌다”고 지적했다.
그는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해서도 “수준이 비슷한 나라끼리 자유무역 하면 득이 많지만, 수준 차가 나는 나라끼리 하면 후진국이 손해”라며 한미 FTA와 한-EU FTA 체결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쏟아냈다. 그는 “5등짜리 학생을 1등 반에 넣으면 경쟁을 통해서 1등을 할 수도 있지만 15등짜리를 넣으면 성적이 더 떨어진다”며 “(사람들은) 우리나라가 선진국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는데, 저는 아직도 15등에 가깝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는 다음달 서울에서 열리는 G20 정상회의에 대해서도 “G20에 포함되지 않은 나라의 이해는 누가 대변하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이번 책에서 그가 흥미롭게 제기한 주장은 ‘인터넷보다 세탁기가 세상을 더 많이 바꿨다’는 것. 세탁기의 등장으로 주부들의 가사노동 부담이 크게 줄면서 여성들의 삶 자체가 완전히 변한 데 비해, 인터넷은 속도 면에서 보면 전보가 이룬 혁신만큼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이다. 19세기 전보 서비스는 대서양을 건너 소식을 전하는 데 2주 걸리던 것을 7~8분으로 2,500배 단축시켰지만 인터넷은 팩스에 비해 고작 5배 단축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 장 교수는 인터넷 시대라며 소위 지식경제, 탈산업사회 등의 이름으로 제조업을 홀대하고 국민경제를 약화시켜서는 안 된다는 자신의 지론을 뒷받침하는 사례로 이를 들었다. 그는 “한국의 경제정책에서 제일 걱정되는 게 제조업 버리고 금융 쪽으로 가려고 하는 경향”이라고 강조했다.
“금융위기 직전에 리먼브라더스가 봉 잡으려고 망하는 회사를 한국에 팔려고 했는데, 그 때 산업은행이 샀으면 나라 망했을 겁니다. 지금 제조업은 중국이 쫓아와서 승산이 없으니까 금융을 키워야 한다고 하는데 금융 부문 선진국은 가만히 있겠습니까. 국민이 나서서 제동을 걸어야 하는 게 많습니다.”
그는 통일 비용에 대해서도 “독일이 구 동독 지역에 GDP의 5%를 지원하고 있는데, 우리의 경우 남북의 인구 및 수준 차가 더 심해 GDP의 25%를 써야 할 것”이라며 “어느 정도 수준이 비슷해진 뒤 통일을 해야 하는데 정치적 여건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신자유주의의 문제점을 비판하며 국제적으로도 명성을 높여온 장 교수의 이번 책은 지난달 초 독일어판이 나왔고 곧 네덜란드, 대만, 일본, 러시아, 태국에서도 번역될 예정이다. 영국 가디언 지는 서평만으로는 모자랐던지 이달초 ‘장하준을 칭찬하며’라는 사설까지 싣고, 밀리반드 영국 노동당 신임 당수에게 장 교수를 점심식사에 초대하라고 권할 정도였다. 장 교수는 “영국 노동당에서 연락 온 건 없고, 현 보수당ㆍ자유당 연립정부에서 몇 번 불러?자문을 했다”고 웃으며 말했다.
장 교수는 또 이날 헌법재판소가 불온서적 소지 등을 금지하는 군인복무규율에 대해 ‘합헌’ 결정을 내렸다는 소식을 듣고는 “지난 번에 군이 을 불온서적으로 지정해 도움이 됐다”며 “군이 이번에도 내 책을 불온서적으로 해주시면 책 파는 데 도움이 되겠다”고 뼈있는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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