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컴한 새벽 길을 나섰다. 전남 영암 월출산의 미왕재에서 일출을 맞겠다는 욕심에서다. 처음부터 새벽산행을 계획했던 건 아니다. 문득 신새벽에 눈이 떠졌다. 도갑사의 새벽 예불을 알리는 사물소리 때문이었다. 잠자는 영혼을 일깨우는 각성의 소리에 정신이 깨어났다. 이불 속에 파묻혀 이리 뒤척 저리 뒤척이며 다시 잠을 청했지만 쉬 눈을 감지 못했다. 그러다 벌떡 일어나 짐을 챙겼다.
소지품을 뒤적였는데 만날 가지고 다니던 랜턴이 보이질 않는다. 어디다 빼놓은 걸까. 가다 보면 여명이 밝아오겠지 하는 기대와 지난 밤 월출산 자락에 걸려있던 보름달을 믿고 길을 나섰다.
월출산장을 나오자 바로 사찰 입구다. 새벽예불이 지난 사찰은 적막했고 어두웠다. 경내를 지나야 산길에 접어들 수 있었다. 컴컴한 산행길의 무사를 기원하며 빈 대웅전에 대고 머리를 조아렸다. 산길은 생각보다 어두웠다. 겨우 휴대폰 액정의 빛에 의지해 걸음을 옮겼다. 불안했다. 발끝 손끝의 촉(觸)을 최대한 끌어내야 했다. 긴장된 걸음에 오감이 살아나는 느낌이다.
혼자 걷는 컴컴한 길. 솔직이 무섭기도 했다. 그저 곧 시간이 흘러 태양이 비출 것이란 믿음으로 어둠을 버텨보기로 했다. 혹시나 멧돼지 같은 산짐승을 만나지 않을까 걱정도 됐지만, 그놈들도 컴컴한 산길 휴대폰 꺼내 들고 올라오는 괴상한 사람을 더 으스스하게 느끼지 않겠는가.
다리가 묵직해지고 등이 땀으로 축축해졌지만 걸음을 멈추지 못했다. 힘들어도 그냥 전진하는 게 마음이 편하다. 가만히 앉아 컴컴한 어둠에 포위되긴 싫었다.
한 시간 가량 올랐을 때 정말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이제부턴 휴대폰 액정을 켜지 않아도 됐다. 시간은 역시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600m 남았다는 이정표부터 미왕재까지 경사가 조금 높았다. 태양이 지평선을 박차고 나오기 직전 마침내 미왕재 정상에 섰다. 새벽 산행의 수고로움을 억새밭 한가운데에 떨쳐 버렸다.
미왕재의 억새는 그리 넓지 않다. 원래 숲이었던 곳인데 오래 전 산불이 났고, 그 터에 지금의 억새가 군락을 이뤘다. 그저 능선 한귀퉁이만 차지하고 있는 억새밭이다. 너른 억새밭으로 유명한 장흥 천관산, 포천 명성산, 정선 민둥산 등에 비하면 그 규모는 초라해 보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왕재의 억새가 그리고 있는 풍경은 그 어느 억새밭보다 화려하고 스케일도 크다.
억새는 단풍보다 먼저 피어나, 단풍이 다 질 때까지 가을을 노래한다. 하늘하늘 흔들리는 억새꽃은 창공에 대고 가을을 그려내는 붓과 같다.
미왕재 억새가 바로 옆 월출산의 구정봉, 천황봉을 그려낼 땐 그 붓놀림은 묵직하면서도 섬세했다. 눈 아래 강진군의 성전 들판을 그릴 때는 고흐의 밀밭을 흉내 내듯 부드러우면서도 풍성한 질감을 담아냈고, 월출산 기암 사이 점점이 물들기 시작한 단풍을 찍어낼 때는 경쾌해진 붓놀림이 스타카토의 변주를 펼친다. 해남 목포로 이어지는 먼 산의 산너울을 그려낼 때 그 수묵 농담의 기교란.
마침내 월출산 천황봉 옆으로 햇덩이가 떠올랐다. 억새밭은 또 온전히 태양의 빛으로만 팔레트를 채워갔다. 억새가 그려낸 일출. 붉은 태양빛을 듬뿍 찍어 올린 붓 그 자체에서 황금빛이 발광을 시작했다.
태양을 그리고, 월출산의 기암과 단풍, 풍요로운 호남의 들판을 그려낸 미왕재 억새가 마지막으로 구름 낀 숭늉빛 하늘에 바람을 그려낸다. 그렇게 가을의 화폭을 완성했다.
월출산(영암)=글ㆍ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 트레킹 TIP/ '여우 목도리' 필요없다 칼바람엔 플리스 재킷
어느덧 뚝 떨어진 기온에 칼바람이 예사롭지 않다. 특히 아침과 낮의 기온차가 커서 산행을 나서는 등산객들은 옷차림 선정이 곤혹스럽다. 기본적으로 여름보다 두툼한 집티에 베스트를 입고 바람막이 재킷을 입고 가지만, 약간 부족함이 느껴지는 게 사실.
이럴 때 플리스 재킷이 유용하다. 일상복으로도 잘 어울리는 플리스 재킷은 기본적으로 보온성과 방풍성이 뛰어나면서 아웃도어와 일상복을 넘나드는 대중적인 스타일이 특징이다.
몸판은 플리스 소재에 배색 부위는 소프트 쉘 소재를 사용한 제품이 전체 플리스로 된 제품에 비해 신축성과 활동성이 높다.
최근에는 몸에 딱 붙는 스타일이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인기가 높다. 보다 날씬해 보이고 싶은 분은 슬림피트 디자인을 선택하도록 하자. 스타일과 기능성을 모두 얻어 일석이조의 효과를 누릴 수 있다.
● 도움말 노스페이스
■ 여행수첩
● 호남고속도로 서광주 톨게이트를 나와 산월IC로 빠져 외곽도로를 탄다. 국도 13호선 타고 나주ㆍ영암 방면으로 가면 된다. 월출산 미왕재로 오르기 위해서는 도갑사를 거쳐야 한다. 법당 뒤 미륵전으로 가는 길이 미왕재를 오르는 등산로다. 도갑사에서 미왕재까지는 1시간20분 정도 걸린다.
미왕재에서 구정봉, 천황봉을 넘어 구름다리가 있는 천황사로 내려갈 수 있다. 월출산 종주코스다. 미왕재에서 구정봉까지는 약 1시간30분, 주봉인 천황봉까지는 2시간 이상 걸린다. 도갑사는 신라말 도선국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국보로 지정된 해탈문, 보물인 석조여래좌상, 오층석탑 등이 볼거리다. 지난해에 복원된 대웅보전은 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복층 형태다.
● 도갑사 앞에 숙박시설은 월출산장이 유일하다. 45년 전에 지어져 시설은 낡았지만, 산속에 파묻혀 있는 옛 여관의 정취를 풍긴다. 된장찌개 더덕정식 촌닭코스 요리 등 식사도 가능하다. (064)472-0405
도갑사에서 20~30분 거리에 낙지요리로 유명한 독천마을이 있다. 독천시장 안에 수십여개 낙지 음식점들이 밀집해있다. 영암군 문화관광과 (061)470-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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