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이 지나고 가을이 깊어가면 재즈 팬들의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경기 가평군에 있는 북한강변의 아름다운 섬마을 자라섬에서 국제재즈페스티벌이 열리기 때문이다. 올해 제7회 대회는 14~17일 열렸는데 이전에 보지 못한 새로운 팀이 무대에 올랐다. 이름은 이판근프로젝트. 한국 재즈의 전설 이판근(76)씨의 음악을 재해석하기 위해 젊은 음악인들이 모인 것이다.
이판근씨가 자신의 곡을 연주하는 후배들을 바라보며 가볍게 웃는다. 그는 “젊은 친구들 실력이 뛰어나다”며 “저렇게 재즈를 잘 하니 내 마음이 좋다”고 말한다. 그를 더욱 기쁘게 한 것은 미국에서 목사로 활동중인 제자 정창균씨가 무대에 오른 것이다. 사람들은 정창균씨를 한국의 로랜드 커크로 불렀다. 소프라노, 알토, 테너 색소폰 3개를 한 입에 물고 연주하는 미국의 로랜드 커크처럼 그 역시 색소폰 3개를 한 입에 넣고 연주하는 재주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판근프로젝트는 이판근씨의 음악을 다시 조명하는 작업이다. 별도의 연주팀을 꾸리고 그의 작품을 음반으로 만드는 것인데, 한국 재즈계에서 특정인의 음악을 주제로 이런 작업을 하는 것은 전례가 없다. 그래서 이판근프로젝트는 그가 한국 재즈계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연주자로, 이론가로, 교육가로 재즈와 평생을 함께 했다. 재즈가 위축되고 그래서 많은 동료가 다른 길로 떠났을 때도 그는 결코 재즈와 결별하지 않았다. 그래서 흔히 하는 말로 그는 그 세계의 대부 혹은 살아있는 전설이 됐다. 그런데도 일반인에게는 그의 이름이 아직 낯설다. 그것은 그가 자신의 곡으로 독립된 음반 하나를 낸 적이 없고, 자신의 곡만을 선보인 공연을 한 적도 거의 없으며, 무엇보다도 일반인에게 재즈가 아직은 쉽게 다가설 수 있는 장르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 재즈의 산실을 뒤로 하고 아파트로
경기 고양시 덕양구 고양동에 있는 그의 아파트에는 짐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1976년부터 살았던 서울 은평구 진관동 기자촌의 자택에서 9월에 이곳으로 이사한 뒤 아직 짐을 말끔히 정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피아노, 기타, 음반 등이 한쪽 방을 차지하고 있다. 그 방에서 그는 재즈를 쓰고 음악을 듣는다. 공동주택이다 보니 악기를 연주하는 것도, 음악을 크게 트는 것도 쉽지 않다. 음악 하는 사람으로서 적지 않은 불편이다. 그러나 더 마음이 아픈 것은 기자촌에서 떠날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이다. 34년 동안 생활공간으로, 녹음실과 강의실로 사용한 기자촌의 2층 건물에는 그의 재즈 인생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그에게 재즈를 배운 제자들은 그곳을 한국 재즈의 모교라고 불렀다. 한국에는 재즈를 기념하는 공간이 없기 때문에, 이씨는 거기에 재즈 기념관을 하나 지으려 했다. 하지만 은평뉴타운 사업이 진행되면서 결국 건물이 수용됐고 이씨는 아파트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아파트에서 함께 사는 딸이 기념관 건립을 위해 뛰고 있으나 적어도 기자촌에 세우는 것은 어려워졌다.
그렇게 들어온 아파트에서 그는 재즈 레슨을 하고 있다고 했다. 아파트에서는 큰 소리를 내면 안되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 가르칠까 궁금했는데, 사실 악기는 사용하지 않는다. 제자라 해도 연주 솜씨가 수준급이기 때문에 따로 악기 다루는 법을 가르칠 이유가 없다. 대신 이판근씨는 자신이 만든 작품의 악보를 보여주고 제자들에게 애드리브 부분의 음계를 채우도록 한다.
재즈는 대개 주제부_발전부_주제부의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처음과 마지막 주제부는 멜로디가 정해져 있지만, 발전부는 멜로디가 따로 없어 연주자가 알아서 즉흥적으로 소화해야 한다. 클래식을 작곡가의 음악이라 한다면, 재즈를 연주자의 음악으로 부르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만큼 연주자의 능력이 중요하다. 이판근씨는 제자들이 채운 애드리브의 음계를 찬찬히 살핀 뒤 품평을 하고 조언을 덧붙인다.
이판근씨는 “발전부는 연주자마다, 또 같은 연주자라도 때와 장소에 따라 달리 전개한다”며 “이것이 재즈를 즉흥적, 직관적 음악이라고 하는 이유”라고 말한다. 즉흥적으로 연주할 수 있는 방식이 바둑의 수만큼이나 많기 때문에 재즈음악이 어떻게 펼쳐질지를 예상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이판근씨는 그러나 그 같은 불확실성이 재즈의 매력이라고 강조한다.
어려서부터 매료된 재즈의 세계
이판근씨는 1934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 교토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려서부터 클래식은 물론 육자배기나 판소리 같은 한국 음악도 많이 들었다. 따로 배우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음악에 소질이 있었는지 웬만한 곡은 몇 번 들으면 악보를 그릴 수 있었다. 하지만 재즈만은 예외여서 도무지 채보를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재즈의 비밀을 풀겠다고 덤벼든 것이 지금에 이르렀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마산으로 건너온 그는 이듬해 葯助?재즈를 듣고 악보를 그릴 수 있게 된다. 중학교 3학년 때는 재즈의 곡조를 듣고 악보를 만든 뒤 학교 밴드부에 연주하도록 했다.
서울대 상대에 진학하자마자 미 8군 무대에 뛰어들었던 그는 대학을 졸업한 뒤 3년 정도 법률사무소 등에서 일하다가 1963년 결국 재즈를 평생의 직업으로 선택한다. 이후 그는 연주자로, 이론가로 상당한 이름을 날렸으며 특히 지금은 고인이 된 이정식씨의 밴드에서 베이스와 편곡으로 맹활약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팝과 록의 물결에 밀려 재즈는 점차 설 자리를 잃었고, 그와 함께 활약한 1세대 뮤지션 대부분은 1970년 이후 다른 장르로 돌아서거나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런 가운데서도 이판근씨는 끝까지 재즈를 고집했다.
그에게 다소나마 힘을 준 것은 1978년 신촌에 문을 연 재즈 클럽 야누스다. 그곳에서 이판근씨는 트럼펫의 강대관, 드럼의 최세진, 기타의 조정수, 색소폰의 김수열, 피아노의 손수길, 드럼의 유영수 등 1, 2세대 재즈 연주자 및 보컬 박성연 등과 함께 월 1회 정기 연주회를 하면서 재즈음악을 이어갔다.
1985년부터는 연주활동에서 손을 떼고 작곡과 후진 양성에 힘을 쏟았다. 지금까지 200곡 이상을 만들었고 3,000명 이상을 가르쳤다. 강태환, 정원영, 김광민, 이정식, 한충완, 정성조, 임인건, 윤희정 등이 모두 그의 문하생이다. 대중가요의 스타 김수철, 인순이, 박학기 등도 한때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는 제자들에게 “한번 간 길은 다시 가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애드리브 부분을 같은 멜로디로 반복해 연주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는 그렇게 후진을 양성하면서도 자신의 곡을 알리는데 무관심했고 세속적 명성도 원치 않았다.
그 이유를 묻자 좀 포괄적인 대답을 한다. “재즈의 정신은 진선미입니다. 진실하고 선하고 아름다운 음악이지요. 그래서 상업성에 굴복해서도 안되고 현실과 타협해서도 안되는 겁니다.”
한국적인 재즈를 만들고파
이판근씨는 자신만의 재즈 세계를 구축하는데 혼신의 힘을 쏟고 있다. 그것은 한국 음악과 재즈의 결합이다. 이판근씨는 “흑인 음악인 블루스가 재즈로 발전했듯, 판소리 같은 한국 음악에서도 새로운 재즈가 탄생할 수 있다”고 말한다. 블루스와 판소리는, 한의 정서가 깔려 있고 화음이 없으며 멜로디가 간단하고 가사가 매우 길다는 공통점이 있다고 그는 덧붙인다.
이판근씨는 이미 20여 년 전부터 이 일을 해왔다. 그가 만든 몇몇 곡에는 국악의 요소가 적지 않게 반영돼있다. 이판근프로젝트가 최근 제작한 앨범 ‘어 랩소디 인 콜드 에이지(A Rhapsody in Cold Age)’에 들어있는 ‘어 페어웰 투 매드니스(A Farewell to Madness)’나 ‘더 랩소디 네버 엔즈(The Rhapsody Never Ends)’ ‘강’ 같은 곡에는 사발가, 한오백년, 쾌지나칭칭나네 등에 나오는 음계를 사용했다. 그래서인지 이판근프로젝트에 참가한 후배들도 “한국인의 감성이 재즈에 그대로 투영돼 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재즈에서 출발했기 때문인지 국악 요소를 지나치게 강조하지는 않는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국악 같으면서도 아니고 아닌 듯 하면서도 맞는 그런 재즈다.
또 하나, 후배들의 실력을 획기적으로 키우고 싶다. 그는 “지금의 연주 능력을 기준으로 할 때, 내가 작곡한 곡을 완벽하게 소화하려면 200년 정도의 시간이 걸릴 것”이라며 “제자들을 잘 가르쳐 그 기간을 50년 이내로 줄이고 싶다”고 마지막 꿈을 살짝 밝혔다.
지금 재즈계는 조만간 재즈의 르네상스가 도래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한국에 재즈가 전해진 지 60년이 지난데다 수준 높은 연주자가 늘어나고 좋은 창작곡이 쏟아지고 있기 때문에 그날이 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판근씨는 바로 그 르네상스를 여는데 자신이 작으나마 도움을 주고 싶다면서, 특별히 젊은이들이 더 적극적으로 재즈의 세계에 뛰어들기를 기대했다.
박광희 편집위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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