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조그만 것이 불나면 소중한 목숨을 살려준다니 든든해요"
#1 6월 12일 오전 3시25분께 강원 홍천군 박모(57)씨의 한옥 주택에서 원인 모를 화재가 발생했다. 소방서가 추산한 재산 피해는 약 1,800만원 정도였고, 진화시간도 30분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박씨는 집안에서 숨을 거뒀다. 단잠에 빠져 있을 새벽에 불이 난데다 몸까지 불편했던 박씨는 끝내 탈출하지 못하고 변을 당했다.
#2 올해 4월 8일 오후 11시30분께 부산 영도구의 한 단독주택에서도 화재가 나 집안에 있던 임모(54)씨가 숨졌다. 불은 500만원 상당의 재산 피해를 내고 40여분 만에 꺼졌지만 임씨 역시 화마를 피하지 못했다. 당시 목격자들은 "누군가 창문을 깨고 탈출을 시도하다 쓰러졌다"고 전했다.
이들 화재에는 몇 가지 닮은 점이 있다. 단독주택 화재에다 야간에 일어났다고, 모두 인명피해까지 발생했다. 또 한 가지 간과해선 안될 공통점이 있다. 바로 집안에 화재 발생을 알려주는 감지 장치가 없었다는 것이다. 만약 발생 초기 화재를 신속하게 인지했다면 유독가스가 집 안에 차기 전 밖으로 빠져나가 생명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화재를 조기에 감지해 경보를 울려주는 단독경보형감지기는 시중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고, 탈부착이 가능하다. 가격도 1만원 안팎에 불과하지만 국내 단독주택에는 이 장치를 단 집이 극소수에 불과하다.
이달 26일 오후 4시 인천 동구 송림동의 한 주택가. 초라한 단층 집들의 낮은 지붕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폭 1m 남짓한 골목길은 마치 미로처럼 꾸불꾸불 연결돼 있었다. 여기에 각종 잡동사니들이 길 한쪽에 쌓여 있어 화재 시에는 큰 피해가 우려됐다. 이곳에서는 독거노인과 소년소녀가장 등 저소득층이 살고 있다.
이 동네에 지난 주 작은 변화가 생겼다. 화재와의 전쟁을 벌이는 소방방재청이 무료로 단독경보형감지기를 설치해 준 것이다. 쪽문을 열고 들어간 독거노인 박모(80·여)씨의 단칸방 천장에도 하얀색 화재감지기가 붙어 있었다. 박씨는 "항상 화재 걱정을 했는데 감지기가 있어 이제는 혼자 잘 때도 마음이 놓인다"며 "불 나면 죽을 것을 살려주는 거라 참 고맙다"고 말했다.
이 동네에서 1차로 혜택을 받은 이들은 독거노인 중에서도 기초생활수급자들이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던 노인들도 소방관들의 설명을 통해 감지기의 정체를 알고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독거노인인 송모(70·여)씨는 "혼자 살기 때문에 불이 나도 바로 알기 힘들고, 대비하기도 힘든 데 감지기가 그 역할을 대신해줘 든든하다"고 말했다.
관할 인천중부소방서 장현호 예방총괄주임은 "독거노인들 집에 설치한 감지기는 1년 뒤 배터리를 교체해 주는 등 사후관리도 철저히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단독경보형감지기는 화재 피해를 막아 주는 간편하면서도 효과적인 장비다. 화재 시 사망 원인은 대부분 대피 지연과 그로 인한 유독가스 흡입이라 한시라도 빨리 화재 발생 사실을 알아 신속히 피할 수 있다면 그만큼 피해를 줄일 수 있다. 그래서 감지기 보급정책은 이미 전 세계적인 추세이고, 일찍부터 추진해 온 선전국에서는 이미 가시적인 성과를 얻고 있다.
27일 소방방재청에 따르면 미국에서는 1977년 주택 내 경보형감지기 보급률이 22%일 때 주택화재로 인한 사망자가 5,865명이었는데 감지기 보급률이 94%로 증가한 2002년에는 사망자가 2,670명으로 절반이나 줄었다. 25년간 감지기 보급이 늘어나면서 주택 화재 사망자는 매년 128명씩 하강곡선을 그렸다. 영국도 마찬가지다. 1998년 경보형감지기 보급률이 8%였을 때는 주택화재 사망자가 732명이었지만 보급률이 81%로 올라간 2001년 사망자는 486명으로 줄어들었다.
글ㆍ사진=김창훈기자 chkim@hk.co.kr
■ '화재감지기 달아주기' 올들어 벌써 8만개 돌파
소방방재청이 올해 시작한 ‘화재와의 전쟁’을 계기로 한국일보를 비롯한 민관 10개 단체가 ‘단독경보형감지기 범국민 모금운동’에 들어가면서 화재감지기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하지만 화재감지기 설치가 의무화된 아파트 등 공동주택과 달리 화재에 취약한 단독주택에 화재감지기가 모두 보급되기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다. 특히 화재로부터 가장 큰 피해를 입는 독거노인이나 소년소녀가장 가구에 대한 사회적 배려와 지원은 절실하다.
27일 소방방재청에 따르면 올해 1월부터 8월 말까지 전국 저소득층 가구에 무상 보급한 화재감지기는 8만1,086개다. 소방방재청은 2007년부터 소방력이 미치기 어려운 도서지역과 산간벽지 등에 점진적으로 감지기 보급을 추진해왔다. 2007년부터 지난해까지 3년간 보급한 감지기가 16만여 개인 것을 감안하면 올해 보급량은 괄목할만한 수준이다.
이런 성과가 나기까지는 관련 단체와 시민들의 인식 변화가 큰 힘이 됐다.
한국일보를 비롯해 소방방재청, 한국화재보험협회, 한국가스안전공사, 한국전기안전공사 등 10개 민관 단체는 이달 초부터 올해 말까지 화재감지기 30만개 달아주기 범국민 모금운동에 들어갔다. 소방방재청은 별도로 전 직원이 고향 부모, 형제, 친지 등에게 화재감지기 선물하기 운동을 펴고 있다.
전국 소방서와 지자체들도 감지기 보급에 열성적이다. 경기 군포 시는 군포소방서와 함께 내달 1일부터 12월 10일까지 저소득층 600가구에 무료로 감지기를 보급한다. 시는 11개 동 주민센터들이 추천한 가구 중 장애인, 독거노인, 모·부자가정, 기초생활수급자 순으로 대상을 정해 감지기를 설치하고, 이후에는 안전교육 등 사후관리도 만전을 기할 계획이다.
경기도소방재난본부도 지난달 소방서와 멀리 떨어져 있는 연천군 중면, 포천시 신북면 장자마을, 동두천시 동점마을을 ‘화재없는 안전마을’로 선정하고, 140여 가구에 소화기와 화재감지기를 보급됐다.
하지만 전국 모든 단독주택에 감지기를 달기에는 더 큰 힘이 필요하다. 당장 하루 벌어 하루 살기도 벅찬 독거노인이나 소년소녀가장 등에게 1만원짜리 감지기는 ‘그림의 떡’일 뿐이다.
현재 전국적으로 화재감지기 자력 설치가 곤란한 저소득 빈곤층은 약 57만 가구로 추산된다. 소방관련 기관이나 단체를 넘어 범 국민적인 지원 체계 마련이 시급한 이유다.
이에 따라 한국일보와 소방방재청은 기업들이 마을과 연계해 나눔운동을 실천하는 ‘1사 1촌 감지기 달아주기 캠페인’에 희망을 걸고 있다. 소방방재청 관계자는 “화재는 한 가정뿐 아니라 마을과 기업, 더 나아가 국가 모두에게 크나 큰 손실”이라며 “화재 없는 사회 구현에 전국민이 함께 나서야 할 때”라고 말했다.
김창훈기자
■ 단독경보형감지기란
단독경보형감지기는 내장된 센서가 화재를 감지하면 자동으로 경보를 내보내는 장치다. 열이나 연기를 빨아들인 즉시 빨간불이 점멸하면서 “삐 삐” 소리를 낸다. 집 밖으로까지 울려 퍼질 음량은 아니지만 집 안에서는 취침 중에도 충분히 인지할 수 있는 수준이다. 소리는 70dB(데시벨) 이상이라 보통 알람시계와 비슷하거나 좀 더 크다.
열감지식과 연기감지식이 있는데 주방기구나 형광등에 영향을 받는 열감지식보다는 연기를 감지하는 방식이 더 효과적이라 소방방재청은 연기감지식 보급에 주력하고 있다. 연기감지식은 화재 초기 신속하게 대피할 수 있도록 소량의 연기에도 반응한다. 그래서 보통 주방에 설치하지 않고 방이나 거실에 부착한다. 담배 연기에도 반응할 수 있다는 점은 주의해야 한다. 한 번 작동한 감지기는 전면의 자동복구 스위치를 누르기 전까지 계속 울린다.
무게는 휴대전화와 비슷하고, 설치도 간단하다. 천장에 볼트로 받침을 고정시킨 뒤 본체를 돌려서 끼우면 된다. 배터리는 본체를 뺀 뒤 교체하면 된다. 시중 판매가는 1년형(망간건전지)이 3만원, 3년형(알카라인 건전지)이 1만2,000원 정도다.
국내에서 형식승인을 보유한 업체는 11개다. 구입 시 프로테크㈜ ㈜리더스테크 ㈜미창 불잡이전자 ㈜제이엔에스테크 ㈜케이텔 ㈜티에스티 ㈜하이맥스 ㈜화경산업 올라이트라이프㈜ 지멘스㈜의 제품인 것을 확인해야 한다. 전국 5,000여 개인 소방용품 판매점에서 가능하다. 최근 백화점과 대형마트 등에서도 판매할 수 있도록 추진 중이다.
소방방재청은 열과 연기를 동시에 감지하고, “삐 삐” 음 외에 “화재 발생” 등 음성까지 내보내는 감지기를 제조업체들과 함께 개발 중에 있다. 배터리 수명도 최대 10년까지 획기적으로 늘린 신형 감지기가 이르면 내년 상반기 중 판매될 예정이다.
김창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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