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영화, 우리에겐 너무나 생경하다. 남미영화라고 해봐야 기껏 브라질의 ‘중앙역’(1998) 정도만을 접한 한국 관객들은 낯섦 때문에 이 영화의 선택을 주저할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 나라에도 좋은 영화가 있을까’라는 근거 없는 선입견은 날려버리는 게 좋을 듯하다. ‘엘 시크레토: 비밀의 눈동자’는 심장을 옥죄는 긴장감과 가슴 에이는 사랑의 정서를 장인의 능숙한 솜씨로 빚어낸 수작이다. 삶의 다양한 풍경과 다채로운 감정을 잘 짜인 양탄자처럼 흠 없이 직조해낸다. 한 사건을 둘러싼 등장인물들의 흥미진진한 사연과 스크린을 가득 채운 풍성한 감성이 오래도록 여운을 남긴다. 보기 드물게 지적이면서 시적인 영화다.
검찰수사관(한국식으로 보면) 직에서 막 퇴직한 60대 남자 에스포지토(리카도 다린)는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그의 글쓰기에는 노년의 여유로움보다 강박과 의무감이 배어있다. 25년 전 해결한 듯 했으나 단죄에는 실패했던 한 사건의 추억이 그를 압박한다. 그가 글을 쓰다 메모지에 무심코 휘갈기는 문구는 ‘두렵다’다. 강간을 당한 뒤 살해된 아름다운 여성, 사랑을 영영 잃고 정지된 시간 속 삶을 택하는 남자 모랄레스(파블로 라고), 우여곡절 끝에 체포됐으나 부당하게 풀려나는 범인 등의 이야기가 소설의 재료다. 여기에 에스포지토와 미녀 검사 헤이스팅스(솔레다드 빌라밀)의 애틋한 사랑이 스미고, 1970년대 불우했던 아르헨티나의 역사가 포개진다. 영화는 에스포지토의 회고이자 그가 쓰는 소설 내용과 현재를 섞으며 이야기를 풀어간다.
강간살인사건을 추적하며 스릴러의 외피를 두른 이 영화의 근간을 흐르는 정서는 무엇보다 사랑이다. 아내를 죽인 범인을 잡기 위해 1년 동안 기차역 대합실을 지키고 있는 모랄레스의 끝 모를 기다림, 관객들을 깜짝 놀라게 할 모랄레스의 지독한 복수, 사건을 해결하고자 하는 에스포지토의 집요함은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한 모습들이다. 영화 중반부에 “남자는 뭐든 바꿀 수 있어. 얼굴, 집, 가족, 여자친구, 종교, 신까지… 근데 못 바꾸는 게 하나 있어 그건 바로… 열정!”이라는 대사가 나오는데 열정을 사랑으로 대체해도 무방하다. 발생 25년이 지난 뒤 사건의 종착역을 확인한 에스포지토가 메모지에 쓴 ‘두렵다’를 고쳐 새롭게 만든 말도 ‘사랑한다’다.
에스포지토와 헤이스팅스가 천신만고 끝에 잡은 범인이 정부의 게릴라 소탕 작전에 도움을 줬다는 이유로 풀려나는 장면 등에선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미제 사건을 만들어내는 올바르지 못한 정치권력의 보편성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올해 미국 아카데미영화상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했다. 지난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하얀 리본’과 심사위원대상 수상작 ‘예언자’ 등 쟁쟁한 경쟁자와 겨뤄 얻어낸 성과다. 아마 많은 영화팬들이 아카데미의 선택에 기꺼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지난해 아르헨티나 아카데미상에서 최우수작품상, 최우수감독상, 남우주연상, 여우주연상 등 12개 부문을 휩쓸었다. 감독은 후안 호세 캄파넬라. 미국의 인기 TV드라마 ‘하우스’와 ‘로 앤 오더’ 등도 그의 솜씨다. 11월 11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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