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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권력의 심기

입력
2010.10.26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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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기관에는 '심기 보고'라는 말이 있다. 정보를 받아보는 사람의 심기를 헤아려 뺄 것은 빼고 넣을 것은 넣는다는 얘기다.

17, 18년 전 문민정부가 막 들어섰을 때 심기 보고와 관련해 에피소드가 있다. 김영삼 대통령이 집권하자 안기부에서는 민주화 투쟁의 동지이자 대권의 라이벌이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 후보의 호칭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놓고 고민했다. 당시 안기부가 생산하는 정보는 A상보, B상보, C상보, 특상보가 있었는데, 그 중 특상보가 대통령에 전달되는 보고서였다.

살아 있는 권력엔 약한 검찰

안기부 정보라인의 데스크들은 일단 예우 차원에서 특상보에 '김대중 선생'이라고 썼는데 청와대 반응이 썩 좋지 않았다. 그래서 전 대통령 후보, 전 총재로 바꿨는데도 분위기가 떨떠름하자 '김대중 씨'로 기록했고, 나중엔 호칭 없이 "김대중은'이라는 식으로 보고서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런 일은 문민정부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2002년 대선에서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가 패배했을 때 특보로 참여했던 한 변호사는 소속 로펌으로 돌아갔으나 한동안 일을 맡지 못했고 결국 연수를 떠나야 했다. 당시 청와대가 어떤 언질도 하지 않았으나 이 로펌은 권력의 심기를 알아서 헤아렸던 것이다. 2007년 대선이 끝난 후에는 정반대의 일이 벌어졌다. 정동영 후보의 측근인 한 야당의원의 배우자가 이 로펌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대선 후 해외연수를 권유 받자 이를 거부하고 사표를 냈다고 한다.

국내 굴지의 로펌조차 권력의 심기를 읽느라 애쓴다는 사실은 한국 민주주의의 수준이 아직 멀었음을 말해준다. 미국에서 할리우드 스타들이 민주당 후보를 지지했다고 해서 공화당 정권에서 출연정지를 당했다거나 곤욕을 치렀다는 얘기를 들은 바 없다. 반대로 대기업들이 공화당 후보를 집중적으로 후원했다고 해서 민주당 정권에서 불이익을 당했다는 얘기도 들은 바 없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권력의 심기가 국가기관은 물론 기업들이나 로펌이 중요하게 생각하고, 헤아리는 대상이 돼있는 것이다.

청와대 보고서나 로펌의 일을 접하기 힘든 보통사람들도 권력의 심기가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잘 안다. 바로 '죽은 권력'에는 가혹하고 '살아 있는 권력'에는 약한 것처럼 보이는 검찰 수사 때문이다. 물론 구체적인 정보도, 증거도 없지만 거의 매일 보도되는 검찰 수사의 앞뒤를 비교하면서 이런 감을 갖게 되는 것이다.

대검 중수부의 C&그룹 수사가 시작되자마자 언론에는 야당 인사 3~4명의 연루설이 보도됐고 결국 종착역은 야당이 될 것이라는 분석들이 실렸다. 검찰은 그렇지 않다는 해명도 하지 않았다. 언론은 검찰 수사를 정치적으로 보고 있는데도, 검찰은 그런 해석에 별다른 문제의식도 느끼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서울지검 특수부의 대우조선해양 수사와 비교하면, 정치성은 더욱 두드러진다. 수사의 속사정은 알 수 없으나 현 정권의 실세로 통하는 천신일 세중나모 회장이 대우조선해양의 협력업체인 임해공업으로부터 40억 원을 받았다는 진술을 확보했는데도 출국금지도, 소환조사도 하지 않았다. 결국 천 회장은 출국했고 검찰은 속수무책인 상황이 됐다. C&그룹 수사 하루 만에 전격적인 압수수색을 하고 회장을 구속한 속도나 강도에 비하면, 너무 차이가 난다.

무슨 수사든 공정하게 해야

국민들은 정확한 내용은 모르지만,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갖고 있다. 현 정권 초 실세에 연임로비를 했다는 의혹을 받던 한상률 전 국세청장의 해외도피마저 오버랩되면 뒷맛은 더욱 개운치 않다. 이런 대조적인 수사 장면이 거듭되면 국민들은 아주 단순하게 검찰이 권력의 심기를 고려한 수사를 한다고 믿게 된다. 그게 오해일 수 있지만, 그런 오해가 결국 검찰의 신뢰를 떨어뜨리고 정권에도 엄청난 부담을 안겨줄 수 있다. 그런 상황을 막는 길은 어느 수사든 공정하고 동일한 원칙에 따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영성 편집국 부국장 Leey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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