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흥미를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역사적 사실은 사실대로 가르치되 학생들이 감당할 수 있는 역사교육이 이뤄져야 합니다.”
지난달 취임한 이태진(67)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의 화두는 ‘역사교과서’였다. 근현대사 교과서를 둘러싼 정치ㆍ사회적 논란이 여전하고 교과서 검정 업무의 국사편찬위원회 이관, 교육과정 개편에 따른 초중고 역사교육 부실화 우려 등 굵직한 현안들이 걸려있는 가운데 국사편찬위원회의 새 수장이 된 그를 26일 과천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실에서 만났다.
1977년부터 지난해까지 서울대 국사학과 강단에 섰던 이 위원장은 고종과 대한제국 연구의 권위자다. 조선 유교사ㆍ농업경제사를 전공한 그는 1990년대 이후 외규장각 도서의 약탈 과정을 밝혔고 고종의 근대화 노선 재조명, 국권 침탈 과정의 불법성을 규명하는 자료 발굴 작업 등으로 대중적 인지도도 높은 역사학자다.
_ 신임 위원장으로서 계획과 포부를 듣고 싶다.
“조선왕조실록의 영문 서비스를 하고싶다. 10년 이상 걸릴 사업이지만 실록을 수정, 보완할 계획인 한국고전번역원과 협력해 순차적으로 번역하기를 희망한다. 실록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돼 있지만 바깥에서는 전혀 모른다. 해외에 한국 전근대사 연구자들도 거의 없다. 이 작업은 한국학이 국제적으로 도약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_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의 중ㆍ고교 역사교과서 검정 심사를 내년부터 국사편찬위원회가 맡게 됐다. 국정교과서 시절로 돌아가는 것이냐는 비판도 나온다.
“교과서가 검인정 제도로 바뀐 것은 긍정적이다. 하지만 그런 과정 끝에 나온 교과서들은 사실 나열 위주이고 ‘왜?’라는 설명이 부족해 국사가 암기과목이라는 편견만 강화했다. 교과서가 흥미 있어야 민족에 대한 사랑이 생긴다고 생각한다. 근현대사의 분량도 30% 정도 줄여야 한다.”
_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역사교과서가 홍역을 앓는다. 역사가 정치투쟁화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심각하다.
“검인정 제도의 도입 취지는 좋았지만 이후 좌우가 서로 편향성 문제를 제기했다. 가령 진보 성향 사학자들은 일제하 사회주의 운동이 항일민족운동이라는 논지를 펴는데, 그런 면이 없지는 않다. 문제는 교과서에서 학생들에게 당시 좌우의 정치노선을 비교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전문가도 판단하기 어려운데 학생들에게는 소화불량이 될 수도 있다. 역사교육은 객관적 사실 전달과 교육적 효과를 모두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_ 민족사와 국가사가 일치하지 않을 때는 무엇을 우선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한국사 연구는 민족사적 관점에서 민족이 걸어온 길을 살피고 나아갈 길을 찾는 공부라고 여겼다. 불행히도 해방 후 남북이 나뉘었고 유엔 동시 가입으로 서로 다른 국가로 인정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역사교육에서는 국가적 입장을 중시해야 한다고 본다. 대한민국 역사교과서는 대한민국을 중심에 놓고 서술해야 한다. 반대로 북한에 관대한 좌편향 서술의 교과서가 있었던 것도 분명하다. 이는 비판해야 하나 그것이 극우적 사관으로 나타난다면 공감을 얻기 어렵다. 사실에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서술하되 그것을 과대평가하는 일은 삼가야 한다.”
_ 역사학자로서 고종 시대에 긍정적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을 해왔다. 왕조시대의 군주가 망국의 책임을 회피할 수 있을까.
“국왕이 국망의 책임을 면할 수 없다. 내 작업은 고종이 아무 것도 안한 무능한 군주였다는 평가를 바꾸는 작업이다. 세계사적으로도 특수한 일본 정도의 침략주의가 아니면 고종의 개혁이 성공했으리라는 점을 이해시키고 싶었다. 그 시대 역사의 긍정적인 면을 살핌으로써 진정한 반성을 할 수 있다. 역사적 사실을 적확하게 파악하는 데서 오는 반성이 미래 역사의 큰힘이 되지 않을까.”
_ 학계에서 국사 연구와 교육에서 일국사적 인식을 넘어서자는 주장이 제기된다.
“국사 과목의 명칭이 ‘한국사’로 바뀌었지만 과거 민족주의적인 한국사 교육에서 탈피해야 한다는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한국사 교과서는 적어도 동아시아 역사서가 돼야 한다. 다만 세계 각 지역의 문명에 대한 교육은 세계사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이왕구기자 fab4@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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