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망대해를 느긋하게 항해하던 호화유람선이 암초에 걸려 좌초, 침몰 위기를 맞았다. 승객들은 구명보트를 타거나 구명조끼를 입을 틈도 없이 바다로 뛰어내렸다. 거센 풍랑은 그들 대부분을 집어삼켰다. 여기서도 힘 있는 그룹은 난파된 배에서 흘러나온 널빤지 조각을 발견하고 재빨리 매달려 살아남았다. 그러나 구조선이 올 때까지 추위와 굶주림을 참고 서로 격려하며 버텨야 한다. 만약 한 명이라도 제 한 몸 편하자고 널빤지 위로 올라가는 순간, 뒤집어져 다 죽는다.
표류 널빤지 잡은 G20 경주선언
월가발 글로벌 금융위기로 타이타닉호의 운명에 처한 세계경제를 살리자고 5대륙의 주요 20개국(G20)이 4차례나 마련한 원탁이 꼭 이 널빤지 조각 꼴이다. 폭과 깊이조차 가늠키 어려운 위기를 맞아 G20은 재정 투입과 금리 인하 등 거시 경제정책에서 손을 맞잡았고 은행 자본 및 유동성 규제 등 금융개혁과 글로벌 금융안전망 구축에도 이마를 맞댔다. 불시에 여기저기서 풍랑이 몰아쳤지만 누구도 감히 공조의 틀을 깨고 보호무역 등 자국이기주의를 고집하는 만용을 부리진 못했다.
그러나 공조의 뒤편에서 미국의 과잉소비와 중국의 과잉저축에 따른 글로벌 불균형은 되레 악화됐다. 그 결과 미국엔 실업자가, 중국엔 돈이 넘쳐났다. 11월 초 중간선거를 앞둔 미국으로선 희생양 또는 사냥감이 필요했다. 봄부터 수 차례 환율시스템 개혁을 요구했으나 뚜렷한 개선조짐이 없는 위안화가 딱이었다. 대중 적자 확대에 고민하던 유럽연합(EU)과 만성적 엔고에 시달리던 일본 등 우군도 확보했다.
때도 좋았다. 서울 G20 정상회의를 전후해 아세아ㆍ유럽 정상회의(ASEM), 국제통화기금(IMF)ㆍ세계은행(WB) 연차총회, 경주 G20 재무장관 회의, 아시아ㆍ태평양 경제협의체(APEC) 정상회의가 두 달 가까이 이어져서다. 얼마 전 발표된 8월 미국의 대중 무역적자가 280억달러를 넘어 사상 최고를 기록했고, 중국의 외환보유액이 일본의 3배에 근접하는 2조6,000억달러를 넘었다는 통계도 나왔다.
중국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먼저 불균형의 근본 원인인 미국산업의 경쟁력 약화를 외면하고 중간선거 등 정치상황을 의식해 이념공세를 편다고 맞받았다. 미국이 경기 부양을 위해 무리한 양적 완화정책을 펴는 바람에 넘쳐나는 글로벌 유동성이 신흥국으로 흘러들어 외환시장을 교란시키고 자산거품과 인플레 등의 위험이 커졌다는 증거도 들이댔다. 미국 요구대로 급속히 위안화를 절상할 경우 기업 도산과 실업이 줄을 이어 결국 세계적 재앙이 초래할 것이라는 위협도 나왔다.
미국이 위기의 책임을 다른 나라에 전가하고 자국 문제를 외국에 수출한다는 중국의 주장은 브라질 등 적잖은 나라의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중국의 '신중상주의적'정책이 빈곤한 개도국의 성장까지 해친다는 비판과 G2로서의 균형 잡힌 역할을 주문하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중국이 위안화 절상 대신 기준금리를 전격 인상하는 공수 겸장의 카드를 내민 이유다.
맥락이 이처럼 복잡하기에 경주 G20 장관회의 전망이 비관적으로 흐른 것은 당연했다. 글로벌 불균형의 원인과 책임을 서로 미루며 내달 정상회의 식탁에 올릴 '미운 오리새끼'를 찾는 게임이었으니 말이다. 미국 중심의 G7이, 또 중국 중심의 BRICs가 별도회동을 갖고 힘을 과시한 뜻도 여기에 있다. 더구나 일본은 경주 회의에 임박해 한국을 환율조작국으로 매도하며 G20 의장국의 리더십을 훼손하는 결례도 서슴지 않았고, 유럽 언론들도 은근슬쩍 거들었다.
리더십 살려 서울서'백조'나오게
G20 워킹그룹의 '경주 공동선언'이 뜻 깊은 것은 이같은 반목과 대결, 견제와 압박, 질시와 갈등을 딛고 표류하는 널빤지 위에 올라가지 않겠다는 합의를 끌어냈기 때문이다. 합의 내용이 불명확하고 구속력이 없다, 무역 불균형을 해소할 대안이 없다, 한국의 부담이 커졌다는 등의 지적은 그대로 받아들여 G20 정상회의 테이블에 올리면 된다.
물론 불신과 적개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서울서도 '미운 오리새끼 찾기'게임이 계속된다는 얘기다. 그래도 몸은 가볍다. 혹시 아는가. 그 놈이 백조일지도.
이유식 논설위원 y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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