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명했던 열두 살 소녀는 옛날 이야기나 역사적 스토리를 이야기 하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이를 유심히 본 담임선생님은 소녀가 매일 친구들 앞에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신이 난 소녀는 자신의 재주를 마음껏 발휘했고, 칭찬과 격려는 그의 꿈을 더욱 키웠다. 그가 한국 근대사를 전공, 사학자가 된 것은 너무 당연했다. 역사는 그에게 겸손과 소통의 중요성을 가르쳤고, 이렇게 몸에 밴 리더십을 인정 받으면서 대학 총장까지 됐다. 그리고 이제 한국의 품격과 이미지를 드높이는 일을 맡게 됐다. 50여년전 아이들 앞에서 역사 이야기를 했던 그가 세계인들에게 한국 문화의 정수와 가치를 소개해 감동을 전하게 됐다. 지난 달 29일 새로 임명된 이배용 국가브랜드위원회 위원장을 만나 국가브랜드 제고 전략과 앞으로의 계획 등을 들어 봤다. 20일 오전 11시 시작된 인터뷰는 '우리 것'에 대한 그의 깊은 애정과 해박한 지식, 빼어난 스토리텔링 솜씨에 빠져 예정시간을 50분이나 넘긴 낮 12시40분까지 계속됐다. 다음은 일문일답.
-어윤대 초대 위원장에 이어 제2대 위원장이 되신 것을 축하 드립니다. 중책을 맡으시자 마자 첫 대외 행사로 인도네시아에 다녀 오셨는데요.
"감사합니다. 11~16일 '한국-인도네시아 주간(Week)' 행사가 있었습니다. 인도네시아는 떠오르는 신흥 시장인데다 세계적인 보르부두르 사원에서 알 수 있듯 문화적 저력도 있는 나라입니다. 서로의 문화를 이해하고 나누면 자연스레 상대방을 존중하게 되죠. 우리가 다른 나라와의 교류를 늘리는 이유입니다. 특히 이번 행사에서 샤이니, 손호영 등 한류 스타들이 참여한 '한-인도네시아 우정 페스티벌'과 '바틱-한복 패션쇼'는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참 잘 합니다. 매우 열정적인데다 능력도 있고 매너도 좋아요. 젊은 사람들에 대한 국가 브랜드 홍보는 젊은 사람들한테 맡겨야 할 것 같습니다. 또 바틱-한복 패션쇼엔 저도 비취색 한복을 입고 갔었는데, 따우픽 끼에마스 인도네시아 국회의장이 '옷 색깔이 너무 아름답고 우아하다 '며 함께 사진을 찍자고 하더군요. 드라마 '대장금'이나 '동이'의 덕을 좀 본 거죠. 드라마 한류는 우리의 것이 세계에도 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우리 역사를 전공하신 분이어서 그런지 역시 우리 것에 대한 자긍심이 크신 것 같습니다.
"현재 인류가 필요로 하는 것이 거의 모두 이미 우리의 역사와 문화 속에 살아 숨쉬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평화, 자연, 녹색, 나눔, 생명, 배려, 소통 등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특히 오랜 역사와 문화 속에서 만들어 낼 수 있는 콘텐츠가 무궁무진합니다. 전혀 생소한 새로운 것을 가져다가 이 것이 한국의 국가 브랜드라고 내세울 게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있는 것을 끄집어 내 지금 시대에 맞게 스토리텔링할 수 있다면 세계인의 가슴 속에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확실하게 각인될 것입니다. 우리에겐 정말 절호의 기회인 셈이죠."
-정말 우리에게 이미 그런 해답들이 모두 있습니까.
"얼마 전 미국 교육부의 고위 관료와 옆 자리에 앉게 됐을 때 이야기입니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이 한국의 교육열에 대해 여러 차례 언급했잖아요. 자연스레 우리나라의 교육열이 화제가 됐죠. 제가 그 때 마침 1,000원짜리 옛날 화폐를 갖고 있었어요. 그래서 1,000원짜리를 쫙 펴서 보여줬죠. 구권 앞면에는 교육자인 퇴계 이황 선생님이 있잖아요. 더군다나 바로 옆엔 투호도 그려져 있어요. 교육도구예요. 또 뒷면에는 도산서원, 즉 교육 인프라가 새겨져 있습니다. 교육자와 교육도구, 교육시설을 화폐에 담은 나라가 세상에 또 어디 있습니까. 이런 설명을 해 주니 감탄을 하더라고요. 특히 투호는 단순한 교육 도구가 아닙니다. 아이들이 졸면 회초리를 들 수도 있겠죠. 하지만 타율이나 강압에 의한 학습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우리 선조들은 대신 투호를 만들었습니다. 잠을 자는 아이들이 눈에 띄면 훈장 선생님은 아이들이 마당으로 나가 투호를 하도록 했죠. 항아리에 화살을 넣는 놀이인 투호는 아이들의 집중력을 필요로 합니다. 잠은 절로 깨는 거죠. 아이들이 스스로 공부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니, 이 보다 더 훌륭한 교육 도구가 어디 있습니까. 이렇게 설명하니 이 고위 관료는 그 1,000원짜리를 좀 줄 수 없겠느냐고 하더군요. 아들이 공부를 잘 안 하는데 그걸 보여주면 잘 할 것 같다면서 부탁하더라고요. 비싼 거면 안 줬을 텐데, 1,000원짜리라서 그냥 바로 선물했죠. 새로 바뀐 돈엔 투호도, 도산서원도 없지만 우리는 그런 정신 문화를 가진 민족입니다."
-재미있는데요, 그런 예를 한 두가지 더 들어 주실 수 있나요.
"경주 불국사나 창덕궁에 가 보셨죠? 물론 중국의 쯔진청(紫禁城)이나 텐탄(天壇)보다 크진 않습니다. 그러나 그래서 세계인을 설복시킬 더 큰 의미를 담고 있죠. 우리는 항상 자연과 소통하며, 자연과의 조화 속에, 결코 자연보다 더 크지 않게, 자연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집을 지었다는 사실입니다. 인간만을 생각하는 이기심 대신 늘 자연까지 배려했을 뿐 아니라 미래 세대까지 고려하는 긴 안목이 있었습니다. 특히 창덕궁은 북한산의 낮은 산자락 구릉을 그대로 활용해 조성했습니다. 더구나 궁궐 안에 작은 논을 만들고 왕이 직접 농사를 지었죠. 백성들의 삶이 어떤 지 직접 체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보다 더한 소통의 정치가 동서고금 또 어디에 있습니까. 임금과 백성이 하나가 되고, 마음과 마음이 통합된 것이니 정말 훌륭한 정치였죠. 또 농사를 지은 뒤 생긴 짚으로는 초가의 지붕을 올렸습니다. 초가집이지만 그 어떤 궁궐보다 튼튼한 성이었습니다. 이렇게 우리에 대해 알면 알수록 한국 문화에 대한 존경심이 생길 수 밖에 없습니다. 사실 우리부터 한국 문화에 대해 잘 알아야 합니다. 외국인이 와서 '창덕궁이 어디 있나요' 라고 묻는데 '잘 모르겠는데요'라고 지나가 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국민 모두 우리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홍보사절이 되고 해설자가 돼야 합니다. 앞으로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비롯, 한국을 찾는 많은 외국인이 전방위로 질문을 할 텐데 우리 스스로 '잘 모르겠는데요' 하면 안 되잖아요. 국가브랜드위원회도 많은 일을 해야겠지만 해외에 나가 있는 분이나 국내에 계신 분이나 모두 우리 역사와 문화의 가치를 알려 나간다면 대한민국 총합의 브랜드가 높아질 것입니다."
-지금 국사는 선택과목인데요.
"필수로 가야죠. 내 나라 내 땅, 우리 문화의 정신과 가치의 소중함을 모르니 숭례문도 물질로 보고 화풀이로 불 태워 버리는 일까지 생기지 않습니까. 우리는 우리 것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면서 무시까지 합니다. 우리부터 우리 것을 존경하지 않으면서 밖에 나가 무슨 대접을 받겠습니까. 국가 브랜드의 중심도 우리의 정신 문화가 돼야 할 것입니다. 바르고 나누고 포용하고 소통하는 정신 말입니다. 그래야만 창의적이면서 지속가능하고 존경 받으면서 사랑 받는 한국이란 국가 브랜드가 만들어질 것입니다. 우리 역사 속에서 길을 묻고 그 토대 위에서 창의성을 갖고 팀워크를 발휘하면 못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그러나 바꿔야 할 것도 있지 않을까요.
"네, 우리나라 사람들이 좀 덤덤하죠. 외국인을 보면 웃으며 '안녕하세요'라고 먼저 인사를 건네면 좋을 텐데, 대부분은 웃는 걸 헤프다고 생각해요. 근엄하고 점잖은 것을 숭상하는 선비문화 영향 때문인 듯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또 온화함이 있잖아요. 우리가 먼저 마음을 열고 외국인을 받아들인다면 그들도 감동해 금방 친구가 될 겁니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더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우리의 문화와 역사, 자연은 차세대들에게도 이어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다 써 버리면 안 됩니다. 항상 씨 뿌리는 자세가 돼 있어야 합니다. 역사에서 지혜를 얻은 뒤엔 또 새로운 것을 창조해야 합니다. 과거는 오래된 미래입니다. 나무 한 그루의 마음까지 역지사지하며 사람의 숨결과 따뜻함이 있는 정신 문화, 균형과 조화를 중시하는 사회와 나라를 이뤄야 합니다. 우리 선조들이 성리학에 다소 치우칠 때 세종대왕께서 한글과 국학을 일으켜 균형을 잡았듯이, 우리도 세계화에 매몰될 것이 아니라 중심을 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한글이 지금도 자랑스러운 역사인 것처럼, 우리도 시대가 아무리 지나도 자랑스러운 유산을 이제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박일근기자 ik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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