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논리적 일관성은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잣대이다. 상황에 따라 상반되는 말을 하는 사람은 믿음을 주지 못한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파르메니데스는 진리는 논리적 일관성에 있으며 그 밖의 모든 것은 허구이며 거짓이라고 주장한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는 감각 세상의 사물들조차 논리의 법칙에 부합하지 않으면 꿈이나 환상이라고 자신 있게 선언한다.
이런 사상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거쳐 서양 철학 정신의 바탕이 되었다. 근대 이후 서양 학문을 수용한 우리에게도 소위 이성이란 논리적 일관성에 입각한 사고라는 인식이 넓게 유포되었다. 감각이나 욕망으로부터 생겨나는 주관적 의지에 흔들리지 않는 논리적 일관성을 추구하고 그에 상반하면 과감하게 거짓과 환상으로 내모는 용기는 서구 이성의 상징이다.
하지만 서양 학문의 수입 전까지 수 천년 다른 문화와 역사를 살아 온 우리에게 논리와 이성의 관계가 그들과 같을 수는 없다. 조선 초기의 청백리 황희 정승의 일화이다. 하인들끼리 다투다 시비를 가리고자 황희를 찾았다. 먼저 한 사람이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자 황희는 "네 말이 옳다"고 대답한다. 그 반대편 사람이 억울함을 토로하며 자신의 옳음을 주장하자 "네 말도 옳다" 고 답한다. 지켜보던 정승 부인이 둘 다 옳은 것은 모순이 아니냐고 묻자, "그러고 보니 당신 말도 옳구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논리적 일관성에서 보면 황희의 태도는 이성적이지 않다. 상반되는 주장의 한편이 참이면 그 반대편은 필연적으로 거짓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황희를 이성적이지 못한 사람으로 치부하는 것은 지나친 소견이다. 논리적 설득을 귀담아 듣지 않는 황희의 태도는 논리적인 언변 속에 실재가 담겨 있지 않다는 생각의 반영일 것이다.
합리적이란 말은 이치에 부합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이치란 보편성을 뜻하는 것으로 사람 저마다의 차이나 특이성에 상관없이 공통되는 성질이다. 말과 행동은 보편성을 갖출 때 합리적 소통이 이루어진다. 이성이란 보편적 이치에 합당하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위 하는 능력인데, 보편성은 논리적 일관성만으로는 결코 실현되지 않는다. 오히려 말의 논리적 일관성만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일은 현혹일 뿐이다. 논리적으로 완벽한 주장을 만들기 위해 골몰하다 보면 오히려 실재로부터 멀어지기 십상이다. 말로 싸워서 상대를 굴복시키려는 소피스트의 궤변은 자신의 이득을 관철시키는 무기일 뿐 실재와는 무관하다.
동서양의 문화적 차이를 떠나 논리적 일관성은 문자를 쓰고 책을 읽을 때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문자나 활자로 소통 할 때는 논리의 법칙을 철저히 지켜야 이해력이 작동한다. 문자를 사용하는 능력이 널리 유포되기 전까지 논리적 일관성에 대한 집착은 발견되지 않는다. 바꿔 말하면 문자를 사용하기 전이나 다른 매체를 사용하는 시대에 이르면 논리적 일관성의 가치는 떨어진다. 소통의 기술은 시대에 따라 변화하며 논리가 진리라는 생각은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
논리적 사고를 강조하고 논리적 설득력을 배양하는 일은 합리적 의사 소통을 위해 필요한 능력을 배우는 일이다. 하지만 논리적인 일관성은 사람의 마음을 현혹하는 힘이 크기 때문에 자칫 정신을 망칠 수도 있는 무서운 무기라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실재와는 동떨어진 논리를 만드는 일에 우리가 얼마나 많은 낭비를 하고 있는 지도 반성해 보아야 한다. 논리적인 설득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황희 정승의 묵묵함이 오히려 필요한 시대이다.
조성우 영화음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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