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빚 늘어 빛 바랜 복지… 팍팍해지는 유럽의 살림살이
남유럽 재정위기로 휘청거리고 있는 유로지역 16개국에는 그리스처럼 낮은 경쟁력, 고물가, 높은 실업률의 다중고에 시달리는 나라도 있고 독일처럼 수출확대, 물가안정, 낮은 실업률을 즐기고 있는 나라도 있다. 하지만 이들은 '유로'라는 하나의 화폐로 묶여 있고 나라 살림도 예전 같지 않다는 점에서는 대동소이하다. 그러다 보니 남유럽 국가를 필두로 독일, 프랑스 등 핵심국가까지 재정건전화에 적극 나서고 있는 상황이다.
먼저 그간 반갑지 않은 시선을 모아온 그리스가 올해 5월 유럽연합(EU)과 국제통화기금(IMF)의 자금 지원을 받는 대가로 2014년까지 재정적자를 국내총생산(GDP)의 3% 이내로 축소하기 위해 사회적 저항에도 불구하고 강도 높은 각종 개혁조치를 도입하였다. 이어 스페인, 이탈리아 등도 앞 다투어 재정개혁안을 내놓은 뒤 이에 대한 반발로 진통을 겪고 있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연금개혁안을 둘러싼 파업이 격화되고 있다. 심지어 통일 이후 가장 빠른 경제성장률을 기록하고 있는 독일도 이미 '재정수지 건전화법'을 제정하여 연방정부의 재정적자 비율 감축과 주정부의 재정균형 달성을 의무화하였다.
유럽의 나라살림이 이렇게 된 이유는 뭘까. 경기침체에 대응해 재정지출을 늘리고 조세부담을 낮추는 것은 교과서적인 정책수단의 하나이다. 실제로 많은 나라에서 이런 조치들이 경기침체에서 벗어나는 데 크게 기여한 것도 사실이다. 또 이 과정에서 재정적자와 정부부채가 늘어날 수밖에 없는 것도 당연하다. 문제는 일부 유럽 나라들의 곳간 사정이 이러한 지출을 부담할 만큼 건실하지도 않았고 앞으로도 그다지 나아질 것으로 보이지 않았기에 가장 취약한 나라부터 하나씩 시장의 신뢰를 잃어버렸다는 점이다.
당초 유럽 여러 나라들은 완전한 '요람에서 무덤까지'는 아니더라도 미국 등 다른 지역에 비해서는 훨씬 잘 갖춰진 사회보장체제를 자랑해왔다. 세금이나 사회보장비 부담이 좀 많기는 하지만 교육, 의료에 대한 부담이 적고 일정 연령에 도달하면 걱정 없는 노후생활을 즐길 수 있으리라는 신뢰는 유럽인의 삶을 풍요롭게 해 온 원동력이었다.
그런데 노령화 사회로 접어들면서 재정부담은 늘어만 가는데 젊고 생산적인 인구는 줄어들고 신흥국과의 경쟁에서도 점차 밀리기 시작하니 옛날처럼 넉넉한 사회보장제도를 유지하기가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경기진작을 위해 빚을 지고 쌈짓돈까지 풀다 보니 이번 위기가 닥친 것이다. 개인이든 나라든 가진 것, 버는 것에 비해 많이 쓰는 구조라면 살림이 제대로 될 수 없는 것이다.
대외경쟁력이 상대적으로 약하고 유로화 도입 이후 급작스럽게 생활수준과 물가수준이 올라간 나라에서 먼저 문제가 터진 것이지, '버는 것보다 쓰는 게 많다'는 관점에서 보자면 독일, 프랑스는 물론 미국, 일본 등도 재정건전화의 필요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형국이다. 세계 최대 채무국 미국은 주(州) 정부 부실재정문제까지 겹쳐있고 일본도 국민들의 '우리 국채' 선호 성향이 낮아질까 남몰래 걱정하고 있다.
이렇게 유럽 나라들의 곳간이 점점 부실해지니 곳간 인심인들 예전 같을 리가 없다. 형태와 정도는 다를망정 유럽 많은 나라가 추진하고 있는 재정건전화 방안들은 결국 국민들에게 더 많이 부담하고 더 적게 받으라는 것에 다름 아니다. 내 나라 사람들 살림이 팍팍해지니 안으로는 호황기에 유입된 외국인 이민자 등 사회적, 경제적 약자에 대한 시선이 점차 차가워지고, 밖으로는 같은 유로지역의 이웃을 도와주는 데 주저하게 되었다. 나아가 외국과의 무역ㆍ환율분쟁이 잦아질 수밖에 없다. 독일의 페터 노일링이 "부(富)가 증가할수록 타인을 위한 지출이 많아진다"고 한 것을 되새겨야 하는 상황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복지사회를 구축해온 유럽과는 달리 우리는 아직도 갈 길이 먼 나라다. 하지만 벌써 고령화 사회, 청년실업 등 유럽이 고민하는 문제들마저 나타나고 있는 상황에서 사회복지 수준을 높여가면서도 재정건전성과 대외경쟁력을 유지하는 묘안을 찾기란 참으로 어려운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좋은 시절에 재정건전화 숙제를 뒤로 미루었던 유럽 나라들이 지금 겪고 있는 어려움도, 한때 '유럽의 환자'로 전락했지만 물가안정을 바탕으로 부활한 독일 경제도, 모두 우리의 좋은 타산지석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김욱중 한국은행 프랑크푸르트사무소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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