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복 지음
문학과지성사 발행ㆍ416쪽ㆍ1만4,000원
“발자크가 말했듯이 파리는 수심을 알 수 없는 거대한 태양이다. 파리를 아무리 잘 알게 되어도 새로운 파리가 나를 기다린다.”(15쪽)
파리를 가본 사람이건 그렇지 못한 사람이건 파리는 유럽에서 가장 친숙한 도시 중 하나다. 파리를 빼놓은 유럽여행이란 얼마나 허전할까를 상상해본다면 동감할 수 있을 것이다.
1980년대 프랑스 사회과학고등연구원에서의 유학 시절을 포함해 15년 넘게 파리에서 살고 있는 사회학자 정수복(56)씨. 5,000여 개가 넘는 파리의 모든 길을 걸어봤다고 자부하는 그가 파리의 속 깊은 곳, 숨겨진 장소들을 찾아간다. 그의 발걸음이 닿는 장소는 350곳을 넘는다. 에펠탑, 몽마르트르 언덕, 노트르담 사원처럼 잘 알려진 관광지도 있지만, 이민자들의 집단거주지이자 위험하고 불온한 동네로 불리는 북동부의 벨빌-메닐몽탕 지역, 파리코뮌의 격전지인 뷔트 오 카이 언덕, 파리 도심 한 가운데 버티고 있는 상테 감옥 같은 장소도 포함된다. 언뜻 보면 공통점이 없어보이는 곳들. 그러나 정씨는 이곳들을 “말을 걸고, 기억을 상기시키며, 감정을 풍부하게 해주며, 예술적 영감을 제공하는” 곳이라고 한 데 묶는다. “장소마다 고유한 느낌과 의미를 품고 있다”고 부연한다.
때로 걷고 때로 지하철을 타기도 하며 저자는 파리의 구석구석을 훑어간다. 그러나 책은 단순히 “파리, 어디까지 가봤니?”를 묻는 여행기가 아니다.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할 때마다 저자는 역사ㆍ정치ㆍ사회적 상상력을 발휘하며 성찰해볼 만한 질문들을 던진다. 상테 감옥의 긴 담장길을 걸으며 감옥 안의 수인들이 아니라 오히려 수많은 감시장치에 포위돼 있는 감옥 밖의 현대인들이 감옥에 갇혀있는 것은 아닌가를 묻는다. 파리코뮌 당시의 혁명노래인 ‘벚꽃 필 무렵’이라는 이름의 식당에 붙어있는 ‘주인을 해고하라’는 표어를 목격하고는 대량 해고의 시대, 노동자들의 운명을 성찰한다.
책 날개의 저자 약력을 확인하지 않고 책장을 넘긴 독자라면 정씨를 대학에서 정치학, 대학원에서 사회학을 전공한 사회과학자로 상상하기 어려울지 모른다. 책장들이 대상을 분석하는 지성과 대상을 감싸안는 감성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미문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이다. “에펠탑은 바라보는 대상이면서 동시에 바라보는 주체 또는 바라보는 장소가 된다. 에펠탑은 주체와 객체, 능동태와 수동태, 양쪽 모두가 될 수 있는 기이한 물체다.” “도시는 언뜻 출구를 찾을 수 없는 미로처럼 보이지만 실핏줄에 피가 흐르듯 막히지 않고 걸어 다닐 수 있는 수많은 길로 이루어진 하나의 생명체다.” 근사한 아포리즘 같은 문장들이 펼치는 향연을 마음껏 즐길 수 있다.
이왕구기자 fab4@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