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한∙일 신(新)시대 공동연구 위원회’가 내놓은 연구 보고서는 양국의 미래 청사진을 제시하는 작업이 쉽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다소 추상적 개념인 ‘공생 복합 네트워크’를 핵심 비전으로 제시한 것도 관례대로 양자 틀에서만 한∙일 관계를 바라보면 강제병합 등 과거사로 묶인 해묵은 문제의 해결이 요원하다는 판단에서다.
따라서 보고서는 향후 두 나라의 협력 관계는 지역과 특정 의제에 얽매인 과거의 패러다임을 뛰어 넘을 것을 주문했다. 한국측 공동위원장인 하영선 서울대 교수는 “20세기 안목과 22세기 안목을 연결하는 징검다리로 놓아야 할 틀을 설정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고 말했다.
21개 세부 추진 과제 중 강제병합을 제외한 20개 과제가 ‘미래’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접근 방법은 과거와 확연히 다르다. 보고서는 한국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의 관계를 세력균형의 구도로 단정하지 않고 세계 정치의 범주에서 보고 있다. 가령 최근 중국의 급부상에 대해 보고서는 “중국이 보편적인 국제규범 및 제도와 관행에 유연하고 효율적으로 적응할 수 있도록 적극 협력할 필요가 있다”고 적시했다. 한ㆍ일관계의 심화ㆍ발전이 대중 관계와 상충되는 것이 아니라 선순환을 도모할 수 있다는 의미다.
한ㆍ일 강제병합 문제를 정치적 수사가 아닌 학술적으로 명확히 규정했다는 점도 눈에 띈다. 보고서는 “일본이 무력을 바탕으로 한국인들의 반대를 억누르고 병합을 단행했다”고 명시했다. ‘무력’이라는 표현을 써 병합의 강제성을 보다 분명히 했다. 지난 8월 “(병합은) 한국인들의 뜻에 반해 이뤄진 식민지 지배”란 간 나오토(菅直人) 일본 총리의 언급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간 것이다.
보고서는 또 정치ㆍ경제ㆍ안보 분야가 주축이 됐던 기존 한ㆍ일 관계의 외연을 확장해 문화 환경 정보지식 과학기술 등 ‘소프트 파워’에 협력을 집중하라고 조언했다. 학생들이 커리큘럼과 학점을 공유하는 ‘캠퍼스 아시아’ 구상이나 사상ㆍ역사 지식을 교류하는 ‘동아시아 지식은행 프로젝트’ 등이 이런 시도로 볼 수 있다.
관건은 역시 보고서의 제안이 실효성을 갖는 정책으로 이어질 지 여부다. 공동연구위원회는 한ㆍ일 정상이 빠른 시일 내에 보고서를 공동선언으로 채택해 주기를 기대하는 눈치다. 그러나 학자들이 중심이 된 전문가 그룹의 새로운 시도가 사고의 전환은 가능케 했을 지 몰라도 정치적 고려를 배제한 점은 보고서가 ‘장밋빛 전망’에 그칠 것이란 우려를 낳게 한다.
일례로 여전히 논란 대상인 독도 영유권 문제는 전혀 거론되지 않았고, 한ㆍ일 해저터널 건설이나 포괄적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등의 과제들도 정치적 결단과 타협을 필요로 한다. 외교 소식통은 “1998년 체결된 ‘신 한ㆍ일 파트너십 선언’은 정상간 합의를 통해 새로운 동반자 관계를 설정했기에 이후 다양한 규제 완화 조치가 뒤따를 수 있었다”고 말했다.
김이삭기자 hir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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