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번 훈련병, 잘 할 수 있습니까. 출발.”
훈련조교 말에 김성민(33)씨의 등줄기에 굵은 땀이 흘렀다. 온 몸을 밧줄에 의지한 채 30m를 건너는 것보다 주위상황이 어떤지 좀처럼 감을 잡을 수 없다는 게 더 큰 두려움이었다. ‘유격훈련의 꽃’이라는 외줄도하. 강심장인 일반인도 외줄 앞에서 본능적으로 덜덜 떨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니만큼 김씨와 같은 시각장애인에게 외줄타기는 공포 그 자체일수 밖에 없었다. 평소 이동할 때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발이 허공에 있는 만큼 외줄 위에서 느끼는 두려움은 일반인보다 훨씬 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해병대 병영체험에 나선 김씨는 PT체조와 산악행군, 개인사격보다 ‘외줄도하’를 가장 힘든 훈련으로 주저 없이 꼽았다. 37명의 참가자 모두 생각이 똑같았다. 해병대 훈련을 체험해보겠다며 나선 시각장애인들의 ‘아름다운 도전’이 경기 김포시 청룡부대에서 21일부터 1박2일간 진행됐다.
도전에 참가한 시각장애인들의 연령은 대전맹학교 소속 소병인(16)군부터 이번 행사를 주최한 한국시각장애인선교연합회의 신인식(54) 이사장까지 다양했다. 시각장애인들이 해병대 훈련에 과감히 도전한 것은 이번이 처음. 시각장애인선교연합회가 해병대 체험을 원하는 회원을 모아 해병 2사단에 신청하면서 이뤄지게 됐다. 신 이사장은 “고위층 자녀와 연예인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군 입대를 기피하는 경우가 많은데 군대에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들의 훈련은 일반인의 체험일정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강도를 다소 낮게 조정했다. 현역 해병대원들은 일대일 도우미를 맡아 만약에 발생할 지 모를 사고에 대비했다.
훈련 첫날인 21일 시각장애인들은 군인들조차 이름만 거론돼도 싫은 기색을 하기 일쑤인 PT체조 24개 동작 중 5개씩을 거뜬히 소화하며 든든한 체력을 뽐냈다. 외줄도하는 안전사고 방지를 위해 지상 1.5~2m 사이에서 진행됐다. 두 손으로 몸을 끌어야 하는 데 따른 엄청난 체력소모에다 공포감까지 더해지면서 많은 시각장애인들이 기진맥진. 이 바람에 예정됐던 두줄도하 훈련은 결국 취소됐다.
다음날 심기일전한 시각장애인들은 부대 인근의 문수산을 빠른 걸음으로 오르내리는 산악행군에서 누구 하나 낙오하지 않을 만큼 강한 정신력을 발휘했다. 개인사격은 안전을 고려, 실탄 대신 공포탄 10발씩을 직접 쐈다. 도우미를 맡은 박주영 이병은 “참가자들 모두 하고자 하는 마음과 열의는 정말 여느 병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며 “저희들이 오히려 더 많은 걸 배운 것 같다”고 말했다.
이들은 사병과 똑같이 식사를 하고, 내무반 침상에서 밤을 보내는 등 병영체험도 무난히 해냈다. 참가자 이대현(33)씨는 “입소 첫날 쇠고기 미역국에 닭고기 볶음을 점심으로 먹었는데 혹시 입에 안 맞을까 했던 걱정이 한 순간 날아갔다”며 “눈만 좋았어도 군대체질”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당초 2007년 시도해보려던 시각장애인 병영체험은 3년이나 늦어졌다. 생각보다 신청자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올해 첫 도전에 대한 참가자들의 반응이 좋아 협의회는 앞으로 매년 이 같은 행사를 갖기로 했다. 신 이사장은 “올해는 여성이 한 명도 없었지만 내년부터는 함께 했으면 좋겠다”며 “이번 일을 계기로 우리 시각장애인들이 사회에서 더 활발한 활동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태무기자 abcdef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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