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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수 칼럼] 황장엽씨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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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수 칼럼] 황장엽씨 생각

입력
2010.10.21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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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일 황장엽 씨가 87세로 세상을 떠났다. 북한의 통치이념인 주체사상을 체계화한 북한 최고의 사상 이론가였으나 1997년 2월 남한으로 망명하여 국립묘지에 묻힌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바라보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와 한반도의 비극을 새삼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조국이 일제의 식민지가 되지 않았다면, 독립 후 남북으로 분단되지 않았다면, 동족상잔의 전쟁이 없었다면, 행복한 삶과 꿈을 이룰 수 있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역사의 수레바퀴에 치여 스러지고 비운의 생을 살았다. 황장엽씨의 죽음은 그런 비극이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는 현실을 일깨워 준다.

"머리 좋은 것과 영리한 것은 달라"

2000년 8월 언론사 방북단의 일원으로 북한에 다녀 온지 얼마 후에 나는 황장엽씨를 만나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는 나에게 "김정일을 만나보니 어떻더냐"고 물었다. "3시간에 걸쳐 점심을 함께 하며 다양한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걸 보니 머리가 참 좋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그를 '영화와 술에 빠진 패륜아'로만 알고 있었다면 큰 일 날 뻔 했다고 느꼈다."라고 나는 대답했다.

황장엽씨는 잠시 생각하더니 "머리가 좋은 것과 영리한 것은 다르다. 김정일은 영리할지는 몰라도 머리 좋은 사람은 아니다. 머리 좋은 지도자가 인민을 굶겨 죽이겠느냐"고 말했다. "나는 그 녀석(김정일)이 어렸을 때부터 가까이서 보았는데, 아버지의 사랑과 신임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영리한 녀석이었던 것은 틀림없다."고 그는 덧붙였다.

그 때 황장엽씨의 모습은 비운의 망명자, 매서운 사회주의 이론가, 대화 상대에 굶주린 외로운 지식인의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그리고 가족이 숙청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말 할 때는 어깨가 내려앉은 바싹 마른 노인으로 보이기도 했다. 김영삼 정부 말기에 망명한 그는 진보정권 10년 동안 손발이 묶인 상태였고, 최근 황장엽 암살조 간첩들이 체포됐다는 뉴스와 함께 반짝 관심을 모으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수백만 인민이 굶주리는데 사회주의가 무슨 소용이냐"는 분노로 망명을 결심했다는 그는 "김정일은 수백만 동포들을 굶겨 죽이고, 온 나라를 감옥으로 만든 민족반역자인데 어떻게 그와 민족공조를 하겠다는 것인가. 햇볕정책은 적을 벗으로 보고 안심하게 하며, 아픔을 잊어버리고 잠들게 하는 마취약이다"라고 김대중 정부를 비판했다. 그리고 최근에는 "북한의 3대 세습은 결국 멸망을 재촉하게 될 것이다. 그깟 놈(김정은)이 무슨 일을 하겠는가" 라고 북한을 강하게 비난했다.

황장엽씨를 생각하며 우리가 갖게 되는 희망은 아무리 세뇌를 해도 인간은 인간일 수 밖에 없다는 발견이다. 김일성 대학 총장 14년, 최고인민회의 의장 11년, 노동당 비서 18년, 김일성의 이론서기와 주체사상연구소장 등으로 북한의 핵심적인 사상가이던 황장엽씨는 김일성 부자의 통치도구로 전락한 주체사상과 수백만 인민의 굶주림에 절망하여 결국 망명을 택했다. 그리고 우리가 만난 그는 말이 통하는 인간이었다. 북한의 핵심세력 내부에, 또는 인민들 사이에 수많은 황장엽이 있을 거라는 기대가 가능하다.

우리 시대의 비극 일깨워

얼마 전 인터뷰에서 황장엽씨는 "나는 좌파도 아니고 우파도 아니다. 나는 민주주의 파고 국민 파다."라고 말했다. 그는 북한의 실상을 외면하는 남한의 좌파를 비판하고 안타까워했다. 그런데 그가 못 다한 이야기는 무엇일까 궁금하다. 그가 남한에 망명하여 발견한 희망과 절망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1997년 망명에 성공한 후 베이징주재 한국대사관에서 아내 '박승옥 동무'에게 이런 유서를 썼다. "…사랑하는 당신과 아들 딸들, 손주들의 사랑을 배신한 나를 가혹하게 저주해 주기 바라오. 나는 이것으로 살 자격이 없고 내 생애는 끝났다고 생각하오…"

한반도의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어디서 누군가 이런 유서를 써야 하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음을 그가 일깨우고 갔다.

장명수 본사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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