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이 진로 문제로 갈등을 빚던 아버지에게 앙심을 품고 집에 불을 질러 일가족 4명이 숨지는 끔찍한 패륜범죄가 발생했다. 범인은 정신병력도 전과도 없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서울성동경찰서에 따르면 21일 오전 3시35분께 서울 성북구 모 중학교 2학년인 이모(13)군이 성동구 하왕십리동 자신의 아파트 안방과 거실 등에 미리 사둔 휘발유를 뿌리고 라이터로 불을 질렀다. 순식간에 번진 불로 잠들어 있던 아버지(46)와 어머니 최모(38)씨, 할머니 박모(74)씨, 여동생(11)은 미처 빠져 나오지 못하고 숨졌다. 함께 사는 고모는 화재 당시 동대문시장의 옷 가게에서 일하다 늦게 귀가해 화를 면했다.
이군은 불을 지른 뒤 아파트를 빠져 나와 집 주변을 배회하다 1시간30여분이 지난 오전 5시께 아파트로 돌아가 경비원에게 "몇 호에서 불이 났느냐"고 묻고 경찰과 소방관들이 보는 앞에서는 통곡하는 등 범행은폐를 위해 갖가지 연기를 했다. 하지만 화재 당시 "홍익대 근처에서 놀았다"는 이군의 몸에서 휘발유 냄새가 나는 점 등을 수상히 여긴 경찰의 추궁에 결국 범행일체를 자백했다. 경찰은 화재 직후 10리터들이 물통을 들고 아파트 출입구를 빠져나가는 이군의 모습이 찍힌 CCTV 화면도 확보했다.
경찰조사결과 이군은 이틀 전인 19일 인근 주유소에서 "과학시간에 필요하다"며 휘발유 8.5리터를 구입, 상가에서 사둔 물통에 담아 자신의 방에 보관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또 범행을 숨기기 위해 불을 지른 후 엘리베이터 폐쇄회로(CC)TV에 찍히지 않으려 계단을 이용해 아파트를 나왔고, 휘발유 냄새가 밴 점퍼를 우연히 만난 노숙자에게 벗어주는 등 치밀함도 보였다.
이 군은 범행 동기에 대해 "춤추고 사진을 찍는데 관심이 많아 예술고등학교에 가고 싶은데 판검사가 되기를 바랐던 아버지가 반대했다. 어제(20일) 아버지가 '공부나 하라'며 골프채로 찌르고 뺨을 때려 범행을 결심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관계자는 "이군은 '아버지만 없으면 우리 집에 평화가 올 것으로 생각했다. 불을 지른 직후 어머니와 동생을 구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불길이 많이 번져 어쩔 수 없이 그냥 나왔다'고 진술했다"고 말했다.
경악할 범죄를 저지른 이군이지만 겉보기로는 멀쩡한 학생이었다. 학교 관계자는 "평소 문제를 일으키거나 결석도 없는 아이였는데 이런 일을 벌이다니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경찰은 "이군이 전과는 물론이고 우울증이나 정신병력이 없는 것으로 파악됐다"고 밝혔다. 이군의 가정은 생활에 어려움이 없는 중산층으로 아버지는 의류업을 하다 1년 전 사업을 접고 다른 일을 모색 중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이날 이군이 형사미성년자여서 구속영장을 신청하지 않고 존속살해, 현주건조물방화치사 혐의로 서울가정법원 소년부로 송치했다.
허정헌기자 xscope@hk.co.kr
강지원기자 styl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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