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후 약방문'식 아닌 '예방·개입·유족 지원' 국가 시스템 필요
"대한사회정신의학회가 추산한 자살의 사회적 비용이 연간 3조8,500억원(2006년 기준)입니다. 그런데 현재 관련 복지예산은 어떤가요, 건강증진기금 6억원이 고작입니다."
하상훈 한국생명의전화 원장은 20일 "행정안전부 여성가족부 보건복지부 등 관련 부처가 어우러져 자살을 선제적(예방), 중간단계(고위험군에 대한 적극 개입), 사후적(자살자유가족 지원)으로 관리하는 국가차원의 총체적인 대응책 마련이 절실하다"고 밝혔다.
자살예방과 자살률 감소를 위해 전문가들은 자살자 통계분석 등 '사후 약방문'식 대처에 그치지 말고 자살 고위험군에 대한 적극적 관리와 예방을 위한 체계적인 국가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범 정부 차원의 대응책과 아울러 이웃이 자살 시도자를 사회에 인계하는 생활안전망도 필수다. 자살예방센터를 지역별로 설치하고 센터를 중심으로 한 사회적 네트워크가 구축돼야 한다는 것이다.
하 원장은 "기본적인 하드웨어, 자살 시도자를 지켜낼 수 있는 제도적 틀 자체가 부족한 게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육성필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도 "지역 공동체에 기반한 보호모델을 구축, 자살 위기에 놓인 사람들을 이웃이나 동료가 센터나 병원에 나올 수 있도록 독려해야 한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또 근본적으로 자살에 대한 시선과 사회적 태도의 변화가 중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양희남 인천시 정신보건센터 위기관리팀장은 "자살을 금기시하는 사회적 분위기 탓에 자살예방 스티커 한 장 붙이는 일도 쉽지 않다"며 "학교에서부터 자살 예방이나 자살 인식개선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 원장은 "유가족이 아픔을 밖으로 드러낼 수 있고 주위에서 '센터에서 도움을 받아봐요'라고 도울 수 있는 생활안전망이 형성되는 사회가 이상적"이라며 "현재 수준의 적은 예산으로는 자살에 대한 인식 개선은커녕 하드웨어 구축도 어려운 상황"이라고 꼬집었다.
연령별, 지역별 특성에 맞는 전략을 세워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육 교수는 "도시의 경우 지역공동체에 기반한 보호모델이 비교적 잘 구축될 수 있지만 인프라가 부족한 농촌은 그렇지 않다"며 "농촌 지역이나 독거노인 등을 대상으로 맞춤형, 찾아가는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 집단에 대한 교육도 필요한 부분이다. 육 교수는 "정신과 의사, 심리학자 등 상당수 전문가가 자살 위기에 놓인 사람의 상황을 식별하고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준비가 돼 있지 않다"며 "학교나 직장 등에서 일반적인 교육을 꾸준히 실시하고 전문가 육성 교육도 병행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명수 서울시 정신보건센터장은 "정부는 예산이 없는 거대 예방계획만 내놓고 손 놓고 있는 실정"이라며 "'자살률이 높다'고 백 번 얘기하는 것보다 사회 전체가 문제 의식을 갖고 자살률 감소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17대 국회에서 발의됐다 폐기된 '자살 예방법'은 강창일 민주당 의원이 18대 국회에서 다시 발의했지만 여전히 표류 중이다.
이성기기자 hangil@hk.co.kr
김혜영기자 shine@hk.co.kr
■ 언어 행동서 이상징후 보이면
자살을 시도하려는 사람은 주위사람에게 반드시 언어와 행동으로 ‘경보음’을 보낸다. 이런 징후가 나타날 때 무심히 넘기지 않고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 중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자살예방 상담전문가들에 따르면 극단적 상황을 생각하는 사람이 보내는 가장 직접적 신호는 ‘죽고 싶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또 ‘내가 죽는다고 누가 신경 쓰겠어’라는 말을 자주 하는 경우도 그냥 넘겨선 안 된다. 그 밖에 상대방이 건강을 돌보지 않거나 평상시와 다르게 행동하는 경우, 활발했던 사람이 갑자기 우울해 하는 경우, 도구(수면제, 끈, 흉기)를 소지하고 있는 경우, 소중한 사람과 사별한 경우, 만성질환으로 고통과 스트레스 받는 경우 등이 모두 포함된다.
이런 징후가 발견되면 자살을 행동으로 옮길 생각이 있는지를 드러내서 물어야 한다. 오히려 괜히 ‘자살’을 상기시키는 게 아닐까 고민하기보다는 ‘무슨 일 있냐, 정말 자살을 고민하냐’라고 묻는 게 바람직하다고 한다. 자신의 괴로움을 밖으로 표현할 기회를 갖도록 하기 위해서다.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도 필수적이다. 24시간 전화상담을 받을 수 있는 곳은 보건복지부가 운영하는 정신건강 상담전화(1577-0119), 생명의 전화(1588-9191), 보건복지콜센터의 희망의 전화(129), 한국청소년상담원(1388) 등이 있다. 여기에서 직접 상담을 받을 수 있는 기관도 소개받을 수 있다. 한국자살예방협회(www.counselling.or.kr)나 생명의전화(www.lifeline.or.kr)는 인터넷 상담게시판도 운영하고 있다.
김혜영기자 shine@hk.co.kr
■ 두 번 자살 시도한 현직 부장판사
"당장이야 죽을 만큼 힘들게 느껴지겠지만 어떤 고통도 언젠가는 지나가게 돼 있습니다. 뒤돌아보면 추억에 지나지 않죠."
서울 동부지법 이우재(45) 부장판사는 20일 "말투나 행동에 습관이 있는 것처럼 사고방식에도 습관이 있는데 긍정적인 생각을 갖도록 훈련해야 하다"고 했다. 누구나 알고, 할 수도 있는 얘기지만 이 판사의 말은 무게가 달라 보였다. 그 자신이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는 만큼 자살충동에 허우적거리는 이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그는 춘천지법 부장판사로 있던 2006년 고부 간 갈등, 수억원을 날린 주식투자의 실패, 업무스트레스 등에 치여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자살 시도도 두 번이나 했다. 치밀한 준비를 위해 병원에서 신경안정제와 수면제를 석 달치나 모았다.
자살 디데이 아침 그는 출근해 잠깐 졸았다. 비몽사몽 중에 2003년 숨진 어머니를 봤다. "상가(喪家)에서 수의를 입고 있는데 갑자기 물벼락이 쏟아져 깼어요. 어렴풋이 보이던 어머니가 아들을 살리려고 그러신 것 같았죠."
그 길로 그는 계룡산의 한 수련원으로 들어갔다. 죽음이 아니라 삶의 희망을 가져보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그곳에서 그는 5개월 넘게 지나온 삶을 돌아보고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때까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내 눈만 갖고 살아왔는데 상대의 시선이 보이기 시작했죠. 역지사지하는 법을 배운 셈입니다."
시나브로 마음이 안정을 찾아가자 49㎏까지 빠졌던 몸무게도 서서히 불었다. '의사의 도움을 한 번 받아봐야겠다'고 정신과 치료를 받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다. 그렇게 2007년 11월까지 1년 남짓 치료를 받았다.
그리고 2년 전 결단을 내렸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우울증 병력과 자살시도 사실을 공개하기로 한 것이다. 그 후 이 판사에게는 문의전화와 편지가 빗발쳤다.
그는 바쁜 일정 속에서도 일일이 답장을 쓴다. 조언은 한결같다. "문제가 있으면 정신과에 가야죠. 전문가인 의사를 믿고 치료를 받아야죠. 우울증은 누구나 걸릴 수 있고 의학의 힘으로 얼마든지 치료가 가능한 질병일 뿐입니다."
그리고 한마디를 더 보탰다. "일주일 전의 괴로움이 그대로인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힘겹고 고통스러운 순간은 끝나기 마련입니다."
항상 찌푸린 얼굴로 잠이 들었다는 그는 "요새는 아내가 '잘 때 보면 (당신이) 세상에서 제일 편한 사람 같다'고 한다"고 웃었다. "세상에는 즐거운 일이 많습니다. 절망에만 빠져 있지 말고 희망을 찾으세요."
이성기기자 hangi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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