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가을 중국의 제 5세대 최고지도자로 대권을 승계하는 시진핑(習近平ㆍ57) 중국 국가부주석은 1960년대 후반 문화대혁명 당시 10번 이상 공산당 입당원서를 제출했다 퇴짜를 맞았다고 한다. 그런 그가 ‘대망의 꿈’을 이루게 된 것은 그만큼 오뚝이 인생을 살았다는 뜻이다. 2003년 그가 직접 쓴 회고록에는 이 같은 역경이 공산당 최고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는 계기와 발판이 됐다고 적혀 있다.
국무원 부총리와 전국인민대표대회 부위원장을 지낸 시중쉰(習仲勛)의 장남인 시 부주석은 혁명 원로들의 자녀그룹인 태자당(太子黨)으로 분류되지만 정작 이로 인해 젊은 시절 정치적 탄압을 받아 7년간 농촌에서 생활하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시 부주석은 회고록에서 “1969년‘지식청년’으로 분류돼 산시(陝西)성 옌안(延安)시 량자허(梁家河)촌으로 내려갔고 이를 전후해 10장 이상의 입당 신청서를 썼지만 집안 문제 등으로 인해 허가가 나지 않았다”고 술회했다. 부친도 1960년대 초반 반당(反黨) 분자로 몰리면서 모든 직위에서 물러나 사상개조를 받는 상황이었다. 당시 그를 믿음직하게 본 현 위원회 서기의 추천으로 그는 결국 부친에 대한 평가가 나오기 전인 1973년 입당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시 부주석은 당시 농촌에서 보낸 7년간의 생활을 이렇게 회고한다. “처음에는 의지할 사람도 없어 무척 외로웠지만 생활에 적응해 가면서 내 숙소는 현지의 마을회관처럼 변해갔다. 노인들과 젊은이들이 찾아오면 내가 알고 있는 동서고금의 여러 문제에 대해 상담을 해줬고 당 지부 서기도 무슨 일이 생기면 나를 찾기 시작했다.” 그는 농촌생활 경험이 실사구시와 인민대중의 실상을 깨닫는 동시에 자신감을 키운 소중한 기회였다고 술회했다. 이러한 역정은 훗날 “권력은 민중이 준 것”이라고 스스로 강조할 만큼 민본주의 정치철학을 정립하는 계기가 됐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정치철학은 2005년 중국 저장성(浙江省)서기 당시 지역 주민들과의 소통 문제를 놓고 담당 공무원들을 비판하면서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그는 “지도자는 항상 인민들과의 직접 교류와 소통을 활발히 해야 한다. 교류와 소통은 인민들이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고 요구하는 지를 경청하고 대화하는 자세에서부터 시작된다”고 강조했다. 그가 언론자유와 인권보장 등 ‘보편적 가치’에 대해서도 열린 자세를 가졌는지에 관심이 가는 이유다.
그가 대권을 움켜질 2012년엔 현 후진타오(胡錦濤)국가주석 등 제 4세대 지도부가 안고 있는 것 보다 더 험한 국가적 난제와 국제적 도전들이 산적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시 부주석은 회고록 마지막 부분에서 이에 대한 답을 제시했다. 그는 “하방(下放)의 경험은 ‘자강불식(自强不息ㆍ스스로 강해지고 쉬지 않음)’의 자세를 키워줬다”며 “어떠한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게 했다”고 강조했다.
베이징=장학만특파원 loca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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