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슴에 못박힌채 남겨진 자… 지워지지 않는 충격에 연쇄 비극도
아버지(58)가 3년 전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딸 이수진(29ㆍ가명)씨는 소식을 듣자마자 "아니다"고 현실을 부정했다. 경찰조사 장례 채무청산 등은 모두 이씨 몫이었다. 어머니는 허공만 응시했다. 이씨는 "모든 걸 떠맡기고 떠난 아버지가 밉다"고 절규하다 이내 "내가 나빴다"고 후회하길 반복했다. 죄책감에 시달리던 모녀는 점차 "네 탓"이라고 서로를 원망했다.
아버지가 자살했다는 소문은 빨랐다. 마을사람들도 괴롭긴 마찬가지였다. 사망 당일 20만원을 빌려달라는 고인의 부탁을 거절했던 이웃들은 자책감에 밤마다 잠들지 못했다. 이웃의 괴로움은 원망으로 변해갔다. "저 집안 때문에"라는 손가락질 탓에 모녀는 결국 도망치듯 마을을 떠나 연락을 끊었다.
자살로 피붙이를 잃은 이들은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고통으로 신음한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1년간 1만5,413명이 자살했다. 미국에서 자살 1명당 평균 6명의 '자살자유가족'이 발생한다는 연구결과를 대입하면, 1년간 국내에 9만2,478명의 자살자유가족이 생긴 셈이다. 자살자유가족이란 한 사람의 자살로 인해 정신적으로 직접적 영향을 받는 가족을 말한다.
실제 2000년부터 10년간 무려 64만4,706명의 국민이 자살자유가족이 됐다. 약 8분에 1명꼴로 발생하는 셈이다. 미국보다 가족주의 전통이 강해 친인척의 범위가 넓은 한국사회의 특수성을 감안하면 실제 유가족은 더 많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자살자유가족이 겪는 충격은 여타 사별(死別)보다 상처가 깊고 오래간다. 자살은 고의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라 가족이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갖기 쉽다. 아울러 죄책감을 느끼는 등 정신적 스트레스가 심하다. 최상미 인천정신보건센터 정신보건사회복지사는 "자살자유가족 대부분이 외상후스트레스증후군에 시달리고 일부는 수십 년간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다"고 했다.
심한 경우 유가족이 자살충동을 느끼기도 한다. 하상훈 한국생명의전화 원장은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이 자살하면 보통 사람보다 자살충동이 80~300배 늘어난다"며 "상처로 마음이 나약해져 충동조절이 안되고 나도 힘들면 비슷한 선택을 할 수도 있다는 학습효과가 강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아버지와 형이 모두 자살한 김준호(23ㆍ가명)씨의 사연이 그렇다. 아버지는 김씨가 유치원생 때 목을 매 숨졌다. 자신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아버지의 선택은 평생 이해할 수 없는 일이자 트라우마(정신적 외상)로 남았다. "죽고 싶다"는 말을 달고 살던 두 살 터울의 형도 20세가 되던 해에 스스로 생을 등졌다.
이후 김씨 역시 자살충동에 시달렸고, 결국 지난해 맹독성 제초제를 들이켰다. 이웃의 신고로 응급실에 실려간 김씨는 다행히 해독제를 마시고 목숨을 건졌지만 해독제 부작용으로 관절퇴행이 진행됐다. 우울증도 앓게 됐다.
자살자유가족에 대한 치유는 심리상담과 비슷한 처지의 유가족끼리 모여 마음을 털어놓는 자조모임만 마련해줘도 어느 정도 치유가 가능하다. 그러나 국내 유가족들은 마음을 털어놓을 곳이 턱없이 부족하다. 현재 정부 차원에서 자살자유가족 상담을 해주는 기관은 서울 인천 경기 세 곳의 정신보건센터뿐이다.
인력도 부족하다. 인천정신보건센터는 최장 1년간 자살자유가족을 방문하고 전화상담도 하지만 80여명의 등록 유가족을 돌보는 복지사는 고작 5명이다. 한 복지사는 "초기에 직접 찾아가 위로하고 회복을 독려해야 세상 밖으로 나와 상담도 받으러 올 수 있는데 인력이 부족해 다 챙기지 못한다"고 안타까워했다.
민간단체 중에는 한국생명의전화가 올해 5월 자살자유가족지원센터를 서울 대전 경남 지역에 마련해 유가족 자조모임을 운영하고 있지만, 역시 정부차원의 지원이나 관심은 없다.
넓은 의미에서 자살자유가족인 친구나 동료에 대한 상처치료도 무방비다. 특히 같은 반 친구가 자살을 한 경우 청소년들은 가족만큼 큰 상처를 입고 정신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이들에 대한 교육당국의 대응매뉴얼은 없다. 하상훈 한국생명의전화 원장은 "자살 사후교육을 지원하겠다고 해도 학교에서 덮어놓고 반대하고 학부모는 '심장마비' '실족사'라고 하며 자살을 숨겨 교육이 거의 이뤄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군부대도 마찬가지라고 덧붙였다.
하 원장은 "국가가 자살과 관련한 의식개선 캠페인과 유가족 심리상담 지원에 나서야 자살을 쉬쉬하려는 문화도 개선되고 유가족들도 정상적인 삶을 되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김혜영기자 shine@hk.co.kr
■ 다른 나라는 어떻게…
주요 선진국에서는 국가 차원의 자살관리 정책이 체계적으로 시행되고 있다. 사전 예방, 개입, 사후 관리 등 단계에 따라 체계적으로 정책이 집행된다.
또 자살충동과 신체적ㆍ정신적 질환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자살자유가족 등 '자살 고위험군'들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도 마련돼 있다. 올해 5월에야 서울과 대전 경남 세 곳에 자살자유가족지원센터를 개설한 우리나라 현실과는 크게 다르다.
호주가 대표적이다. 1990년 인구 10만명당 자살자 수가 12.5명이던 호주는 10년 만인 2000년 9.98명으로 22%나 줄어들었고, 2006년에는 7.5명까지 내려갔다.
이는 보편적 자살예방 정책뿐만 아니라 자살자유가족 정신질환자 등 고위험군을 대상으로 한 개입 정책, 자살 위험 신호가 발견되는 사람이나 자살 시도자에 대한 사후 관리 등 맞춤형 정책을 추진한 결과다. 특히 관련 기관이나 단체에서는 자살 시도자에게 편지나 문자메시지 이메일 등을 보내는 '메일링 서비스'도 제공하고 있다.
자살률을 낮추기 위해서는 자살 시도자에 대한 집중적인 관리도 필수다. 일본과 홍콩에서는 일부 병원에 자살 시도자가 오면 상담을 통해 치료하는 '자살 시도자 사례 관리자'를 상주시키고 있다.
유가족이 서로 상처와 아픔을 보듬으며 치유하는 자조(自組) 모임도 활성화해 있다. 일본 자살자유가족지원 시민단체 '라이프링크'는 유가족 문제를 당사자 목소리로 드러내며 자살예방운동에 앞장서고 있고, 미국 자살예방재단에서는 자살자 유가족이 가족 사진 등을 담은 장신구를 목에 걸고 밤길을 걸으며 상실의 슬픔을 극복하는 행사를 마련하고 있다.
이성기기자 hangil@hk.co.kr
■ "행복전도사도 자살…" 베르테르 효과 경각심 높여야
"그렇게 행복했던 분도 자살하지 않았냐는 전화가 매일같이 와요."(정신보건사회복지사)
'행복전도사'로 인기를 끌었던 고 최윤희(63)씨의 자살 여파로 자살예방관련 단체들이 패닉 상태다. 특히 최씨를 자살예방 교육강사로 초빙했던 기관의 당혹감은 더하다.
실제 지난달 최씨를 '행복멘토'로 불러 자살예방 교육을 열었던 한 센터 관계자는 "여파가 엄청나다"고 힘겹게 입을 열었다. 이 센터는 올해 7월과 9월 두 차례 최씨를 강사로 초청해 자살예방교육을 열었고, 이후 연말까지 매달 강연이 예정된 상태였다. 최씨는 9월 강연을 마치고 갑자기 예정된 강연을 취소하겠다고 통보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지난 7일 최씨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상담전화가 밀려들었다.
상담사들은 "정말 행복이란 건 없나 봐요, 이런 교육이 다 무슨 소용이에요" "오죽했으면 그런 분도 자살했겠어요"라는 사람들의 호소에 말문이 막히더라고 했다. 이들이 가장 우려하는 것은 유명인의 자살을 모방하는 베르테르 효과(Werther effect)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한나라당 이애주 의원은 지난달 통계청 자료를 분석한 결과, 고 최진실 등 유명인의 자살보도 이후 2개월간 그 전보다 평균 606.5명이 더 자살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한국생명의전화 관계자는 "유명인의 자살선택에 대한 동정론이 강하게 일면, 나도 힘들 때 저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할 위험이 있다"며 "유명인 자살 사건을 미화하거나 정당화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김혜영기자 shin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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