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마침내 대기업과 대주주(오너)들의 탈세 문제에 칼을 빼 들었다. 공정사회가 구축되려면 무엇보다 조세정의가 뿌리 내려야 하고, 조세정의를 실현하려면 세금 빼돌리는 관행부터 엄단해야 한다는 것이 정부 생각. 서민들과 봉급생활자들은 ‘유리지갑’처럼 소득이 그대로 노출돼 꼬박꼬박 세금 다 내는데, 정작 대기업과 오너들의 탈세 관행을 방치한다면 공정사회도 상생협력도 공염불이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19일 이헌동 국세청장이 취임 50일만에 가진 첫 대외행사로 법무ㆍ회계법인대표 간담회를 마련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형식상으로는 대기업과 대주주들의 세무대리인(법무ㆍ회계법인)을 불러 성실 납세에 관해 협조를 ‘당부’하는 자리였지만, 내용상으론 사실상 대기업과 오너들의 탈세에 대한 전쟁을 선포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게 일반적 시각이다
이 청장은 지난 달 터키 이스탄불에서 열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세청장 회의에 참석 한 뒤 “주요 대기업 세무대리인들을 불러 설명할 자리를 만들라”고 실무진에서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청장은 OECD 각국 세정책임자들과 만나 얘기를 나누면서, 국내 대기업들이 외형적으로는 글로벌 기업반열에 올랐으면서도 세무관행에 관한 한 얼마나 뒤떨어져 있는지 새삼 느끼게 됐다는 것. 글로벌 대기업들은 탈세나 조세회피를 중대한 리스크로 받아들여 세무관리의 목표를 ‘세금을 최소화하는 것’에서 ‘성실하게 세금 내는 것’으로 이미 바꿔가고 있는데, 우리나라 대기업과 오너들은 아직도 오로지 세금 적게 내는 것에만 몰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청장은 “글로벌 대기업들은 탈세나 조세회피 등 성실납세 불이행을 기업 가치에 심각한 위험을 초래하는 행위로 인식하고 있지만 우리 대기업의 이사회나 CEO는 이런 세무위험 통제에 관심이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공정사회 구축을 위해서도, 또 대기업이 글로벌 플레이어로 성장하기 위해서도, 이젠 세금에 관한 인식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탈세와의 전쟁’에서 국세청이 특히 중점을 둘 분야는 ▦변칙적인 상속ㆍ증여(부의 대물림)와 ▦역외탈세(해외 재산 빼돌리기) 등. 이와 관련해 국세청 관계자는 “대기업 사주나 가족의 경우 필요할 경우 다른 나라처럼 특별 관리하고 회사를 이용해 재산을 해외로 빼돌리는 행위에 대해서는 엄정하게 책임을 물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국세청은 대기업ㆍ대주주들의 탈세가 전문가집단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이날 국내 굴지의 로펌과 회계법인 대표들을 불러 모은 것도 바로 이런 맥락. 아울러 앞으로 로펌과 회계법인들도 탈세나 불성실 소득신고 등을 돕는다면 조세범 처벌에 관한 법규정을 적극적으로 적용해 엄정 처리한다는 방침이다.
현행 조세법처벌법은 세금을 대리신고하는 자가 조세 면탈을 위해 거짓으로 신고한 경우 2년 이하 징역 또는 2,000만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하고 있다. 이 청장은 이와 관련해 “그간 회계법인이나 법무법인들이 세법의 사각지대를 활용하거나 입법취지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문구해석으로 (대기업의) 탈세나 조세회피행위에 도움을 주는 경우도 있었다”고 지적하며 “엄격한 윤리 기준에 따라 공익적 견지에서 판단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정중한 표현이었지만, 사실상 경고의 메시지란 평가다.
손재언기자 chinas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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