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에게서 조국이 해방되던, 8.15의 광복!
그 감격과 감동은 천지개벽을 맞는 듯했다. 그것은 바로 새로운 세계의 시작, 신천지의 시작이었다. 문자 그대로 천지개벽이었다. 겪은 사연도 하고많고 당해본 사건도 한 둘이 아니다. 이제 새삼스레 되돌아보는 것만으로도, 그 눈길이 갈피를 잡지 못할 것 같다.
그런 중에도 정신 차리고 굳이 마음 가다듬어서 돌이켜 보게 되는 사건이며 일이 있기 마련이다.
8.15를 맞고 며칠도 안 지나서, 지금의 부산의 국제시장 터에 묘한 일이 벌어졌다. 그 현장은 워낙 '소개(疏開)' 터였다. 거기서 나는 조국 해방의 보람을 나 나름으로 실컷 누리고 즐기곤 했다. 그 현장은 나의 '해방공간'이었다.
일제는 패전이 가까워지면서 부산 시내를 소개시켰다. 인구가 밀집된, 시가지 일부를 철거해서는 빈 터로 비워버리는 것을 '소카이'라고 했다. 한자로는 '疏開'라고 쓰는데, 우리말로는 소개라고 읽는 이 낱말은 빈터 또는 공터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 미국 공군의 공습으로 패전 직전의 일본 본토는 쑥밭이 되어가고 있었다. 한데 그 여파가 한반도에 미치게 되고 피해를 입게 될 것은 뻔한 일이었다.
그걸 피할 수 없을 것으로 예상한 부산시 당국이 당시로는 번화가였던 부평동 1가의 건물을 몽땅 철거해서는 소개했다. 폭격을 당해서 화재가 일어났을 때, 불길이 이웃으로 번져 가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 취한 조처였다.
그 거대한 공터의 일각에, 해방을 맞자마자 얄궂은 장터가 마련되었다. 글쎄, 장터라고 말하기가 좀 꺼려지기도 하지만 달리 이름이 붙여질 것 같지도 않다.
소개 터의 빈 공간, 여기저기에 경매장이 벌어졌다. 상품이라고는 몽땅 일본인들의 일용품, 잡화 그리고 옷가지 따위였다. 장사꾼들이 말하던 바에 의하면, 그 물건들은 일본인들에게서 압수한 것이라고 했다. 한데 그 사연을 위해서는 설명이 좀 필요할 것 같다.
패전을 당하고는 한국에서 쫓겨나게 된, 일인들은 누구나 부산으로 모여들었다. 일본으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서였다. 당연히 짐 보따리를 이고 들고 또 지고 했다. 그 패전민들의 처참한 행렬이 한 동안 계속되었다.
그런데 무슨 영문인지 몰라도 그들 짐 보따리의 일부가 한국인들에게 압수당했다고 했다. 그게 법적으로는 어떤 것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압수한 것만은 틀림없었던 모양이다.
해방하고 한 동안, 일인들의 가옥을 적산(敵産), 곧 적의 자산이라고 불렀는데, 그걸 정부에서 압수해서는 민간에 불하(拂下)해서 판 적이 있었다. 그것에 버금할 또 다른 적산이 일본으로 돌아가는 일본인들의 짐 보따리였을까? 이건 필자로서는 알 길이 없다.
아무튼 일인들의 짐 보따리가 소개 터에서 경매에 붙여졌다. 일본 말로 '코리'라고 부르던, 큰 짐짝을 뜯어보지도 않은 채였다.
경매꾼들이 서로 값을 불러대다가 최고의 비싼 값을 부른 사람에게 낙찰이 되면 거간꾼은 '톳타!' 라는 외침과 함께, 코리를 낙찰자에게 넘겨주었다.( '톳타'는 일본 말로 '땄다'를 의미하는데, 국제시장이 한 때, 도떼기시장이라고 일컬어진 것은 이 때문이다.)
한데 낙찰자는 그 당장, 모여든 사람들에게 물건들을 소매 값으로 팔았다. 그래서는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일본인들의 옷을 비롯해서 가재도구들이랑 그 밖의 잡화들이 팔려나간 것이다. 참 절묘하게도 그 짐 꾸러미 속에는 지폐 뭉치가 들어 있기도 했다. 해방하고도 한 동안 조선은행권이 사용되었음을 생각하면 기가 찰 일이다. 푼돈으로 짐 꾸러미의 낙찰을 받아서는 큰 돈 뭉치를 챙긴 사람은 모르긴 해도 조국광복의 은덕을 크게 칭송했을 것 같다.
이 글로서는 여기까지는 도입부에 불과하다. 본론은 이제부터다.
낙찰된 짐짝에서는 더러 책이 쏟아져 나왔다. 어떤 것은 책으로만 채워진 것도 있었다. 그 당시 얼마 동안이지만, 낙찰 받은 사람은 '에이, 재수 옴 올랐어!' 투덜대면서 책들을 냅다 땅바닥에 내팽개치다시피 했다. 물론 거의 몽땅, 일본어로 된 책이었다.
중학교 2학년이던 나로서는 그게 대단한 횡재였다. 노다지나 다를 것 없었다. 눈에 띄는 대로 참고서를 챙겼다. 문학 책을 비롯한 인문계통의 책들은 내 마음대로 내 차지가 되었다. 그것도 공짜로! 장사꾼들에게는 폐품인 것이 내게는 귀물이고 보물이었다. 버려진 것을 나는 내 품으로 끌어안고는 집으로 모셔가곤 했다.
일제 말기,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시절을 막 겪어내고는, 먹을 것, 입을 것 등등 소위 생활필수품도 귀했던 판에 책이라니! 그것은 얼토당토않은 사치였다.
그러자니 교과서마저도 학교에서 배급을 받았다. 어떤 과목은 아예 교과서가 배정되지 않기도 했다. 그런 터에 교과서 아닌, 다른 일반 도서를 구해 본다는 것은 영영 불가능했다. 소설이나 시집이나 교양서적은 꿈에서나 읽혀지면 천운이었다.
사춘기의 초기, 꿈 많던 그 시절에 지적으로 또 정서적으로 舅恍?흉년을 당하고는, 정신적으로 또 영적으로 까칠하게 메말라 있던 시기에 책이 그냥 공짜로 펑펑 안겨지다니! 그것은 인생 대풍! 인생에 정서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엄청 큰 풍년이 든 것이었다.
그 책들 가운데는 일본 문학 책이 가장 많았지만 세계문학 책들이며 교양서적도 적잖이 포함되어 있었다. 내가 세계문학에 진작 가까워진 것은 순전히 그 덕을 본 때문이다.
나는 이래서 남들이 쓰레기로 팽개친 것을 보물로 거두었다. 흔히 기적적으로 행운을 당하면 '쓰레기 더미에서 황금을 줍다'라고들 말하지만 나로서는 황금을 몇 조각 주운 정도가 아니다. 아예 쓰레기 더미가 황금더미였던 것이다.
그러나 조금 시일이 지나서 낙찰자들이 돈 받고 책을 팔게 되기까지 내게 황금은 계속 굴러들었다. 그래서도 나의 광복은 어린 내 인생의 황금기가 된 것이다.( 일부 상인들은 도떼기 시장의 책들을 따로 모아서는 가게를 차렸는데, 그것이 오늘날 부산의 보수동의 헌책방 골목이 됐다.)
지금도 나의 서재의 책꽂이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그 오랜 황금덩이들! 그 앞에서 이따금 나는 '조국 광복 만세!' 라고 소리 없이 외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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