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쩌둥(毛澤東), 덩샤오핑(鄧小平), 장쩌민(江澤民), 후진타오(胡錦濤)를 이을 중국의 차기 최고지도자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 부주석이 사실상 확정됐다. 시 부주석은 18일 폐막한 제17차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5차 전체회의(17기 5중전회)의 마지막 세션인 중앙군사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대권승계의 보증수표인 중앙군사위원 부주석으로 선출됨에 따라 2012년 가을 차기 권좌에 오를 명실상부한 대권 후계자로 입지를 굳히게 됐다.
과연 시 부주석은 어떤 인물인가.
후 주석이 돌발사건에 능한 정치형 지도자라면 시 부주석은 준비와 계획에 강한 경제형 리더로 통한다. 지장이면서 덕장으로 꼽힌다. 시 부주석은 지난해 12월 한국방문 때 이명박 대통령에게 한중자유무역협정(FTA) 협상에 대해 중국 최고지도자로서는 처음'구동존이(求同存異: 같은 것은 추구하고 이견은 남겨둔다)'정신을 강조했다. 그는 당시"양국이 의견이 일치하는 것부터 조속한 시일 내에 협상에 착수하기를 바란다"고 말하는 등 실용적 가치관을 드러냈다.
신중하다는 평을 듣는 그는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내세우기보다 화합을 강조한다. 후 주석 체제이래 9인의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들이 각자 맡은 분야별로 집단지도체제로 국정을 운영하는 추세가 강화되고 있다. 따라서 인화(人和)에 강하고 실용주의에 능한 시 부주석의'포용성(包容性) 리더십'은 새롭게 등장할 5세대 중국 지도부를 원만하게 이끌어 가는데 강점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2007년 10월 열린 17기 1중전회에서 권력서열 6위로 올라선 그는 2008년 제11기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에서 정부 2인자인 국가 부주석에 발탁돼 차세대 지도자의 입지를 다졌다. 공산당 혁명원로로서 국무원 부총리와 전인대 부위원장을 역임한 아버지 시중쉰 (習仲勛)의 영향으로 일찍이 공산당에 입당했다. 고급간부의 자제들 그룹인 태자당으로 분류되지만 아버지가 문화혁명을 전후해 정치적 탄압을 받으면서 7년간 농촌에서 살아야 했다.
고초를 겪으며 그는"자부심을 갖되 자만하지 말자, 의욕을 갖되 떠벌리지 말자, 일에 힘쓰되 경솔하지 말자"는 좌우명을 갖게 됐다. 이 좌우명은 2012년 중국 공산당 제18차 전국대표대회(18전대)에서 그가 최고 지도자로 최종 결정되기까지 계속 필요한 덕목일 것으로 보인다. 시 부주석은 문혁이후 칭화(靑華)대 화공과에 다녔지만 나중에 법학박사학위도 받았다.
그는 푸젠(福建)ㆍ저장(浙江)성, 상하이(上海) 등 지방에서 25년간 근무하면서 착실히 일선 경험을 쌓아 중앙 정계로 약진하는 밑거름을 삼았다. 성장론자인 그는 푸젠성장 당시 '전략경영의 전도사'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경제구조를 조정하고 종합경제력을 높여 푸젠성 국내총생산(GDP)를 전국 10위로 끌어올렸다. 2006년 장쩌민 전 주석의 측근인 천량위(陳良宇) 상하이 당 서기가 수뢰사건에 연루됐을 때 후임서기를 맡아 포용과 신뢰로 조직을 큰 동요 없이 이끈 것이 당 원로들의 인정을 받는 계기가 됐다. 상대적으로 국제감각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있지만 시 부주석은 이를 만회하기 위해 지난해에 이어 올해 유럽에서부터 아시아까지 외교활동의 보폭을 늘리고 있다.
한국과의 인연도 깊다. 2005년 저장성 서기시절 처음 한국을 방문했고 항저우(杭州) 임시정부 청사가 2007년 다시 문을 열게 된 것도 그의 조력덕분이다. 지난 해 12월 한국을 방문, 이명박 대통령을 비롯, 김형오 국회의장, 정운찬 전 국무총리 등을 두루 만나 인맥을 넓히기도 했다.
시 부주석은 인민해방군 유명 가수인 펑리위안(彭麗媛ㆍ현직 소장계급)과 결혼해 그녀와의 사이에 외동딸(明澤)을 두고 있다.
베이징=장학만특파원 loca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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