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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의 고난속에 큰 기회있다] <67> 은퇴 후의 한중망(閑中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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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의 고난속에 큰 기회있다] <67> 은퇴 후의 한중망(閑中忙)

입력
2010.10.18 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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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그러겠지만 현직에서 물러난 뒤 가장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건강관리이다. 나는 무릎 운동기구와 역기를 결합해 놓은 기구를 집에 두고 매일 아침저녁으로 이용하고 있다. 이것은 근육운동에 필요할 뿐 아니라 특히 무릎이 좋지 않은 내게는 필수적인 운동이다. 목욕은 거의 매일 대중목욕탕에서 하고 있는데 거기서 실내운동을 하기도 한다. 어려서부터 하고 있는 맨손체조는 지금도 하고 있으며 한국은행 최성주 본부장의 권유에 따라 앉아서 맨손으로 할 수 있는 도인술(導引術)도 매일 하고 있다.

유산소 운동으로는 골프와 산책을 즐긴다. 골프는 뉴코리아나 송추 골프장에서 매주 한 두 차례 하는데 우리 내외가 같이 하거나 친구나 제자들과 하기도 한다. 평창동 집에서는 북악산 팔각정이 보이는데 우리 내외는 손자들과 같이 자주 이 길을 오른다. 팔각정까지 오르는 길은 한 시간 가까이 걸리는데 우리에게는 적당한 코스이고 오르고 내려오는 길이 다양하여 좋다.

한은 총재직에서 물러난 다음 해인 2007년 1월 말 나의 모교인 알바니(Albany) 뉴욕주립대학교에서 편지가 왔다. 이 대학 이사회에서는 2007년 5월 19일의 졸업식에서 나에게 인문학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키로 결정했으니 졸업식에 참석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총장에게 전화를 걸어 자세한 내용을 물어보았다. 이 대학은 매년 졸업식에서 모교출신 또는 뉴욕주 출신으로 사회적 공로가 크다고 인정되는 사람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하고 있는데 외국인으로서는 내가 처음이라 하면서 반드시 참석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즉석에서 참석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우리 내외는 5월17일 뉴욕으로 떠났다. 뉴욕에서는 한국은행 사무소직원, 대학 동기들 그리고 제자들과 각각 모임을 가졌다. 그리고 다음날 기차를 타고 알바니로 갔다. 허드슨강을 따라가는 이 기차 길은 30여 년 전 내가 오가던 아름다운 길이다. 알바니에서는 나의 중앙대 제자로서 여기 와 있는 임강택 박사와 대학 의전관이 마중을 나왔으며 피츠버그에서 공부하고 있던 막내아들 준(浚)과 친지들도 합류했다.

내가 33년 전 서른여덟의 나이로 박사학위를 받던 바로 그 자리에서 5월19일 나는 일흔하나의 나이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마침 여름방학 중인데도 경제학과 교수들 10여분이 졸업식에 나오고 나를 위해 경제학과에서 환영다과회를 베풀어 주었다. 여기에는 내가 배운 은사인 이봉석 교수와 인도인 우팔 교수도 있어 더욱 반가웠다. 그리고 저녁에는 나를 위한 총장 주최 만찬이 있었으며 그 다음날 저녁에는 30여 명의 이곳 재학생들과 식사를 같이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나는 학교 주변의 이곳 저곳을 둘러보기로 했다. 1972~74년 이곳에서 공부할 때 가족을 한국에 두고 혼자 와 있었기 때문에 아내와 가족에게 그 자리의 모습을 보여주고도 싶었고 내가 다시는 이곳에 못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있어서였다. 그리하여 내가 강의 받던 교실, 내가 살던 기숙사 그리고 이따금 친구들과 맥주를 마시던 선술집 등을 찾아보았는데 30여 년이 지났어도 옛날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귀로에는 휴스턴 교민들의 초청으로 ‘남북협력과 통일전망’에 대해 강연을 하고 돌아왔다.

2008년 2월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뒤 2009년 6월 대통령 자문 국민원로회의가 출범했는데 청와대로부터 나를 위원으로 위촉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당초 과분하다는 생각이 들어 사양했으나 경제전문가로서 역대 모든 정부에 직접 간접으로 참여해온 나로서는 이명박 정부에도 협력코자 하는 마음에서 비록 상징적인 자리이기는 하나 참여키로 했다. 모두 59명의 위원 중에는 이철승 백선엽 송인상 서영훈 박동진 남덕우 박태준 씨 등 대선배들이 많고 나는 젊은 층에 속했다. 경제분과는 모두 9명이었다. 그 동안 몇 차례 모임이 있었는데 나이가 많은 분들이어서인지 지나치게 보수적이고 경직적인 내용의 발언들이어서 정부정책에 얼마나 실질적인 도움이 될지는 의문이었다.

신문기고 방송출연 강연 등 사회활동은 내가 꼭 나설 필요가 있다고 여겨지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가급적 자제키로 했다. 그런데도 지상파 방송과 경제TV 그리고 일간지와 경제지 등에 대담 출연 기고를 꽤 많이 했다. 내가 주로 참여한 이슈는 부동산 종합과세를 강화해야 한다는 것, 수도권 분산과 국토 균형발전이 필요하다는 것, 선진화를 위해서는 의식개혁이 선행해야 한다는 것, 수능성적 중심의 대학 입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 고교평준화 정책을 제대로 시행하든지 아니면 아예 평준화제도를 폐기하라는 것,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존중하라는 것 등이었다.

2009년 5월 나는 대전에 있는 한국과학술원(KAIST)에서 ‘국제금융위기와 한국경제의 진로’에 대해 특강을 한 일이 있다. 그런데 이때 마침 카이스트 에서는 신입생을 입학사정관제로 선발하겠다고 발표하였는데 이것은 내가 오랫동안 주장해온 바여서 매우 좋은 선택이라고 격려해준 일이 있었다. 그 뒤 입학사정관으로 봉사해줄 수 있느냐고 물어왔기에 나는 흔쾌히 수락하였다. 이렇게 나는 KAIST의 입학사정관이 되어 내 자비로 지방 고등학교를 찾아다니며 학생들과 선생님들을 만나 입학사정을 했다. 학생의 능력을 평가함에 있어서 수학능력시험 성적은 작은 일부분에 불과하며 이보다도 인성 잠재능력 천재성 사회성 등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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