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그문트 바우만 지음ㆍ한상석 옮김
후마니타스 발행ㆍ192쪽ㆍ1만원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독일 감독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 영화 제목이기도 한 이 말은 현대인의 인간조건을 요약하는 명제처럼 통한다. 파스빈더의 영화는 모로코 출신 노동자와 독일인 노년 여성의 사랑 이야기를 빌어 전후 독일의 불안을 그린 걸작이다.
폴란드 출신의 유대인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85)은 ‘유동하는 근대’라는 개념으로 현대인의 불안과 공포를 다뤄온 석학이다. ‘유동하는’ 근대는 국민국가의 울타리 안에서 사회통합과 안전을 꾀하던 ‘견고한’ 근대와 대치되는 개념으로, 예측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세계다. 유동하는 근대에서 안전한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으며, 불안은 개인이 혼자 짊어져야 할 몫이다. 무방비로 노출된 위험 앞에서 유토피아는 이상적인 종착지가 아니라 오직 살아남기 위해 끝없이 도피하는 여정일 뿐이다.
바우만의 2007년 작 는 이런 세계를 지옥이라고 말한다. 지옥을 벗어나는 방법은, 이 책의 맨 끝에 인용된 이탈리아 작가 칼비노의 말을 빌면, 크게 두 가지다. 지옥을 받아들여 그것의 일부분이 되거나, ‘누가 그리고 무엇이 지옥이 아닌지’ 알아내려고 고투하거나. 바우만의 선택은 후자다. 맞서 싸워라, 지옥이 아닌 곳을 찾아내라.
모두스 비벤디(modus vivendi)는 ‘삶의 양식’이라는 뜻의 라틴어다. 이 책은 현대인의 불안정한 삶의 양식을 유동성 개념으로 설명하는 바우만의 연작 가운데 가장 최근작이다. 바우만에 따르면, 유동하는 세계에서 개인은 이상을 향해 전진할 힘이 없다. 삶 자체가 불확실해져 앞날을 기약할 수 없으니, 생존과 안전에만 매달리게 된다. 국가는 더 이상 사회를 보호하지 못한다. 최근 글로벌 금융위기에서 드러났듯, 지구 전체를 유린하는 시장의 변덕과 탐욕 앞에 국가의 역할은 그때그때 위기관리와 긴급조치뿐이다. 신자유주의의 확산과 인터넷의 발달 등으로 세계는 활짝 열렸지만, 이는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바우만은 유동하는 근대의 특징들로 인해 삶은 “끊임없이 변하고 언제든지 폐기될 수 있는 순간들의 모음”이 되고 있다고 말한다. 아차 하는 순간 ‘나도 쓰레기가 될 수 있다’는 불안과 공포가 현대인의 삶의 조건이 되었다는 것이다. 산업화시대의 산업 쓰레기처럼 유동하는 근대는 ‘인간 쓰레기’를 양산한다. 해고 당한 비정규직 노동자, 자신의 땅에서 추방된 난민들, 범죄자 등이 그 범주에 속한다. 문제는 인간 쓰레기를 재활용할 여력이 없다는 것이다. 한번 쓰레기가 되면 영원히 쓰레기 신세다. 선진국들은 빈곤이나 전쟁 등 여러 이유로 자국에 들어오려는 난민들을 황무지에 격리 수용함으로써, 원주민 사회 바깥으로 ‘토해낸다’. 난민은 영원한 난민이다. 세계는 선순환을 멈췄다.
지옥에서 잘 사는 사람들도 있다. 지옥의 규칙을 숙지해서 그 흐름에 올라타면 된다. 살아 남으려면 죽어라고 달려라, 끝없이 변화하라. 그것이 지옥의 도덕률이다. 지옥의 권력자들은 ‘인간 쓰레기’로 분류한 빈민과 난민들을 유령으로 만들고, 자신들의 영역을 난공불락의 요새로 구축함으로써 그들의 세상을 구가한다. 이 책은 지옥의 규칙과 풍경을 생생하게 포착하고, 그 토대를 면밀히 분석한다. 그리하여 지옥을 지옥이 아니라고 우기거나 지옥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하는 사람들에게 맞설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한다.
바우만의 주장은 현대의 특징을 ‘위험사회’로 규정한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벡의 논지와 상통한다. 국가 단위의 위험사회론을 전 지구적 차원으로 확장해 분석한 책 에서 벡은 소외된 자들의 연대를 포함한 ‘세계시민주의’를 대응전략으로 제시했다.
반면 바우만은 오늘의 세계가 왜 지옥이 됐는지 원인을 탐구할 뿐, 지옥을 살 만한 곳으로 바꾸기 위한 투쟁의 구체적 방법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불확실성의 시대에 대한 처방은 독단적이고 시기상조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지옥을 은폐하는 장치들을 폭로함으로써, 투쟁 의지를 독려한다. 지옥에서 견딜 것인가, 맞서 싸울 것인가. 우리는 갈림길에 서 있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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