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중국 부상'의 여파가 심상치 않다. 이른바 '차이메리카'로 불리는 중국과 미국 중심의 국제질서에서 팍스 시니카(Pax Sinicaㆍ중국 중심 국제질서)로 치닫는 느낌이다. 2조5,000억 달러의 세계 최대 외환보유국, 미국에 이어 세계 두 번째로 군사비를 많이 지출한 나라(2009 SIPRI연감), 지난해 독일을 제치고 세계 최대의 수출국가로 부상하더니 올 하반기에는 일본을 누르고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등극할 것이 확실시 된다.
이러한 객관적인 수치 못지않게 국제사회에서 중국의 영향력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최근 중·일 양국간에 벌어진 센카쿠(尖閣)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ㆍ釣魚島)를 둘러싼 영토분쟁에서 일본이 '백기투항'한 사건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이미 2008년 프랑스가 베이징올림픽을 앞두고 중국의 티베트 인권문제를 제기했다가 곤욕을 치렀고, 2009년 덴마크 기후변화협약(UNFCCC)회의에서는 중국이 가장 큰 성과를 얻어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한국은 지난 7월 유엔안보리에서 천안함 사건을 규탄하는 결의안 추진과정('의장성명' 채택)에서 중국의 반대로 천안함 공격의 주체도 명시하지 못하는 수모를 당해야 했다. 이밖에 천안함 사건 대응차원에서 서해에서 열리려던 한ㆍ미연합군사훈련은 중국의 강력한 반발로 동해에서 열리며 훈련의 규모도 다소 축소되는 양상을 보였다.
그러면 중국의 독주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어차피 미·중간 안보·경제마찰이나 중·일간 영토분쟁 등 갈등상황이 하루아침에 종결될 사안이 아니기 때문에 국제사회는 파국을 맞기 전에 장기적인 안목에서 역내 평화기제(메커니즘) 구축에 힘을 쏟아야 할 때다.
우리는 차제에 국제정치(외교)사의 교훈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나폴레옹전쟁을 종식시킨 비엔나체제(1815) 이후 국제정치사는 '현상유지'(status quo) 세력과 '현상타파'(anti-status quo) 세력간의 갈등과 충돌로 점철돼 왔다. 크림전쟁(1853)은 대륙국가 러시아의 지중해 진출시도를 기득권국가인 영국 프랑스 등이 견제하면서 빚어진 것이고, 러ㆍ일전쟁(1904)은 지중해진출이 좌절된 러시아가 극동에서 남진정책을 펼 것으로 예상한 영국이 역시 영ㆍ일동맹(1902)을 통해, 일본에 힘을 실어 줌으로써 좌절시킨 것이다. 이에 앞서 영국은 이미 러시아에 대한 선제포석으로 한국의 거문도를 강제점령(1885)한 바 있다.
1차 세계대전은 30년 종교전쟁(1618~1648)으로 피폐해진 독일이 재기해 뒤늦게 건함경쟁에 뛰어들면서 현상유지(기득권) 세력인 영국 프랑스 등의 협상국과의 대결양상이었고, 2차 세계대전과 태평양전쟁 역시 현상타파세력인 독일의 설욕전 양상과 군국주의 일본의 미국 등 서방국에 대한 도전으로 비롯된 것이다.
이제 세계는 지난 20여년의 탈냉전 기간 '팍스 아메리카나'시대의 종말을 고하고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차이메리카'시대에 접어들었으며, 중국은 궁극적으로는 내심 팍스 시니카를 꿈꿀지도 모른다. 문제는 이러한 과정에서 극동의 화약고(powder keg)인 한반도가 주 전장이 되는 제3의 열전장이 될 우려가 없지 않다는데 있다. 김정은 3대 세습체제로 나아가는 북한의 정정불안은 언제라도 기폭제가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고르바초프의 등장으로 소련·동유럽의 개혁·개방정책이 도입되고 그 결과 유럽에 평화가 정착된 것을 내세우는 학자도 적지 않으나 그에 앞서 고르바초프의 등장을 가능하게 한 것은 거의 전 유럽 국가가 참여하는 유럽안보협력회의(CSCE)와 헬싱키프로세스였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아·태지역 안보협력회의와 아시아판 헬싱키프로세스가 시급히 구현되어야 할 소이(所以)다.
김경수 명지대 국제정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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