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정부는 '공정사회'란 신선한 화두를 던졌다. 그러나 "무엇이 공정사회인가" 묻는다면 응답이 그리 쉽지 않다. 기회균등, 정치권의 청렴성, 노블리스 오블리주 정신의 사회 조기정착 등 말하는 이들의 생각이 서로 다르다. 솔직히 말하면, 20세기 사회에 있어서 공정사회에 대한 언어적 정립이나 사회적 합의가 덜되어 있다.
정부가 정책을 펴가면서 일정 부분합의를 만들어 낼 수 있겠지만, 양극화 사회, 승자독식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거센 21세기에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현실이 생각을 따라오지 않을 때 우리는 이론을 먼저 제시하고 실천을 해 나갈 수밖에 없는데, 공정성이라는 이념이 바로 그런 것이다. 정부가 먼저 이론적 체계를 마련하고 정책을 펼친다면 보다 실천이 쉬워질 것이다.
우리사회에는 현재 동서양의 민주주의 철학이 공존하고 있다. 공정사회에 관한 논의는 이런 공존의 민주주의로부터 출발한다. 아주 솔직한 예를 들자. 근대 서구사회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한데 모여 테이블 위에 놓인 음식을 자기가 먹고 싶은 만큼 자유롭고 공평하게 가져다 먹는다. 이처럼 누구나 똑같은 기회를 체득한 서구사회는 '기회균등'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소화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사회는 그렇지 않다. 기득권자가 본인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거나 사용하고 있다. 모 장관처럼 말이다. 양극화가 심한 이 시대 약자들은 모든 게임에서 불리하게 되어 있다. 우리사회에 있어 기회균등이란 강자나 약자에게 똑같은 환경과 조건을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약자에게 제도적으로 혜택을 부여할 때 비로소 성립된다.
한국의 전통 민주주의 철학은 '배려'와 '절제'에서부터 출발한다. 우리의 밥상문화를 살펴보면, 집안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독상을 받고, 그 상을 물리면 2차 집단인 여자와 아이들이 겸상을 받아먹는다. 이때 윗사람은 음식을 독식하지 않고, 상을 물려받는 사람을 위해 음식을 남긴다. 이것이 윗사람의 식사예법이었다.
이런 배려가 한국식 노블리스 오블리주다. 이렇게 우리 전통문화가 배려를 체득하게 했다면, 그 유전자를 지니고 있는 우리는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동반 성장이나 가진 자들의 사회적 투자를 이끌어 내는 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한편, 우리밥상 문화는 절제라는 정신세계를 가지고 있다. 협소한 공간에서 음식을 동시에 차려놓고 여럿이 둘러앉아 먹을 때 서로 양보하거나 절제하지 않으면 식사는 어려워진다. 식사도중 소란스럽게 말을 많이 하면 복이 나간다 하여 절언(切言)을 요구한다.
이는 옆 사람을 위한 자신의 절제를 강조한 것이다. 현대사회는 절대적 빈곤보다 상대적 박탈감이 정신세계를 무겁게 한다. 4억원을 몸에 걸치고 TV에 나와 자랑을 하는 20대를 보면서, 400만원이 없어 월셋방을 전전하는 서민들의 삶을 생각하게 된다. 가진 젊은이의 '절제' 없는 행동이다. 조금 불편하고, 충분치 못하더라도 건전한 정신사회를 위해 절제해야 한다. 우리는 수백 년 동안 절제 문화를 체득하며 살아오지 않았는가.
이런 동서양의 공존적 철학으로부터 공정사회가 해석되고,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낼 때 이 정부가 추구하고 있는 '공정사회론'이 성공적으로 완성 될 것이다.
권일현 한국폴리텍대학 기획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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